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의 이야기
왜 사람들은 악할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 왜 사람들은 때때로 ‘악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까.
나는 외국인 노동자다. 외국에 와서 일하고 생활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선택이었다고 해서 그 선택이 항상 정당하거나 쉬운 건 아니다. 선택의 자유와 현실은 따로 놀 때가 많다.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차별과 편견은 ‘선택’이란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그건 결코 당연하거나 견뎌야 할 몫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모두가 착하게 살 수는 없나?” 나도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해봤다. 분명 좋은 사람들도 많다. 도움을 주는 이, 친절한 이, 작은 친절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왜 일부는 굳이 상처를 주고, 굳이 약자에게 등을 돌리는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배움의 부족, 환경의 폭력성, 생존을 위한 경쟁심, 혹은 그저 습관화된 무관심—모두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내가 차별을 당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만들어서 견뎌왔다. “그들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 “배워서 그렇지 못한 걸 거야”, “결국엔 악은 되돌아간다” 같은 생각으로 나를 달랬다. 그래도 가끔은 숨이 막혔고, 화가 났으며, 밤새 울기도 했다. 울고 나면 잠깐은 속이 시원해지는 듯했지만, 며칠 지나면 같은 상처가 다시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 도망 다니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궁금하다. 악하다는 건 본성일까, 환경일까, 아니면 선택일까. 그리고 나는 또 묻는다. 왜 사람은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가. 키가 작고, 눈이 다르고, 언어가 매끄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을 당해야 하는가. 같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깨달음도 생겼다. 어떤 이는 악하게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처와 두려움, 무지와 피로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하려는 시도는 나를 지치지 않게 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들도 힘들었을 거야”라는 위로는 때론 진짜 위안이 되어, 분노만으로는 못 버텨낼 날들을 이겨낼 힘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매번 그렇게만 살아갈 수는 없었다. 울고 분노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이 필요했다. 나는 작은 경계선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욕을 당하는 순간을 그냥 넘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연습을 조금씩 했다. 말이 서툴러도 정확히 어떤 행동이 잘못인지 지적하고, 도움을 요청할 줄 알게 되었다. 모든 싸움에서 이기는 건 아니지만, 하나하나 작은 승리를 쌓아가다 보면 마음의 힘도 변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요즘은 자주 이런 생각에 이른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환경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다. 하지만 떠난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불안과 무기력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이가 들수록 멘탈이 강해지는 걸까, 아니면 겁이 많아지는 걸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시간은 단지 나를 강하게도 하고, 더 조심스럽게도 만든다.
매일 마음이 약해졌다 강해졌다 하는 반복 속에서, 나는 한 가지 희망을 붙잡고 있다. 말랑말랑한 마음이 언젠가 강철처럼 단단해질 거라는 기대가 아니라, 유연하게 단단해지는 것이다. 완전히 굳어버린 강철은 부러지기 쉽다. 반면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마음은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 상태에 닿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실수와 눈물도 필요하며, 작은 승리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세상을 원하나요?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가끔은 쉬운 이해 대신 질문을 던지는 사회라면 적어도 누군가가 차별로 숨이 막히는 일은 줄지 않을까. 나도 아직 답을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오늘도 나는 한 발짝을 내딛고, 또 한 번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운다. 그 과정이 느리고 서툴러도, 결국엔 조금 더 나은 자신을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