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살자!
25년을 회고해 보니 몇 가지 느낀 점이 좀 있다. 진작에 좀 썼어야 했는데 게을러서 글쓰기를 잘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글은 좀 다듬어서 쓰려고, 좀 더 멋있게 쓰려고 하다가 미루는 경향이 좀 있었다.. 앞으로는 그냥 대충 내 생각 적어내려고 한다. 나만의 공간은 아니긴 한데 뭐 다른 사람이 봐도 좋을 내용들로 써보려고 한다.
25년 1월 1일에는 뭘 했냐 보면 다이어리를 사고 다짐을 좀 10가지 정도 적었었다. 일단 다이어리 쓰기가 1번이었는데 부끄럽지만 정확히 1월 15일까지 쓰고 안 썼다.
다른 사람은 자책이라도 하면서 올해 1월 1일에 또 다짐을 적고 열심히 해보겠는데 나란 놈은 죄책감도 안 들고 그냥 대충 살겠다는 다짐이나 쓰고 있다. 회고해 보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난 다짐을 적을 때만 도파민이 나오고 막상 실천할 땐 도파민이 그만큼 안 나오는 사람인 것 같다.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계획들을 보면서 "와, 올해는 진짜 잘될 것 같아"라는 환상에 취해 있는 그 순간이 피크였다.
대충 살겠다는 게 한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간 "완벽하게 잘 살아보려다" 처참하게 망해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처음부터 부정할 생각은 없다. 노력해서 이뤄낸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시험을 앞두고 책상에 오래 붙어 있어서 성적이 올랐고, 실험 데이터를 반복해서 분석하다가 논문이 나왔고, 몇 번의 거절 끝에 마침내 원하는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배운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상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한다. 똑같이 애쓰고 있는데 꿈은 가까워지지 않고, 오히려 멀어진다. 특히 사랑에서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락하고, 챙기고, 기다리고, 맞춰주면서 버티는데, 관계는 가까워지기보다 무거워진다. 간절함은 금세 집착이 되고, 집착은 나를 갉아먹는다.
잠들려고 "제발 자야 한다"라고 이를 악물수록 잠이 도망가듯, 행복을 "꼭 잡아야 하는 목표"로 좇을수록 행복은 뒷걸음질 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노력의 역설(Effort Paradox)'이라고 부른다—노력은 가치를 만들지만, 일정 한계를 넘으면 오히려 목표를 "가치 없고 피곤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성공 스토리는 대개 "내가 얼마나 밀어붙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시험, 취업, 연구 같은 영역에서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함정이 있다.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게 아니라, 노력이 '내가 통제 가능한 과정'에 꽂혀 있을 때만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오늘 이 챕터를 3번 읽겠다"는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실험 조건을 5가지로 바꿔보겠다"도 내 손안에 있다. 이런 노력은 뇌를 효율 모드로 만들고,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배분하게 만든다. 결과가 보장된 건 아니지만, 최소한 과정은 내가 컨트롤한다.
하지만 사랑은 구조 자체가 다르다. 사랑에는 상대의 자유의지라는 독립변수가 있다. 내가 아무리 잘하고, 성실하고, 오래 매달려도, 상대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관계"로 성립하지 않는다. 물리학 언어로 치면 단일 시스템이 아니라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다. 한 입자만 힘을 준다고 원하는 궤도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쪽만 계속 밀면 다른 입자는 튕겨 나간다.
게다가 연애에서는 노력의 방향이 자주 잘못 꽂힌다.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대신, '상대의 마음을 바꾸는 것'에 에너지를 쏟아버린다. 그 순간부터 노력은 사랑이 아니라 설득이 되고, 설득은 금세 압박이 된다. 겉으로는 "너를 정말 좋아해서 그래"지만, 속으로는 "이 정도 했으면 나도 그럴 자격 있지 않냐"는 거래의 언어가 자란다.
더 큰 문제는 한쪽이 너무 열심히 하면 다른 쪽이 아무것도 안 하게 된다는 점이다. 더 하는 쪽은 점점 더 지치고, 덜 하는 쪽은 점점 더 무감해진다. 결국 노력은 관계를 살리는 게 아니라 소진시킨다.
그래서 같은 "노력"인데도 일에서는 결과를 만들고 사랑에서는 나를 갉아먹는다.
여기서 핵심 질문이 생긴다. "과거에 노력해서 성공한 경험은 뭐였나? 왜 그때는 통했나?"
답은 단순하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는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가.
2024년 연구에 따르면, 같은 사람이라도 "지금 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라고 느끼는 순간에는 처리 속도(processing speed)가 유의미하게 빨라졌다. 이것은 목적의식이 성격이 아니라 뇌의 '작동 모드'를 바꾸는 스위치라는 의미다.
또 다른 신경과학 연구는 뇌가 목표가 명확할 때 에너지를 무작위로 쓰는 게 아니라, 과제와 관련된 네트워크에 선택적으로 더 많이 배분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마치 전력망이 특정 구역에 선택적으로 전기를 보내듯, 목적이 있으면 뇌도 효율 모드로 전환된다.
2023년 연구는 더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 과제 목표가 명확할 때 뇌 네트워크의 모듈성이 낮아지면서(=네트워크들이 더 통합적으로 작동), 반응 시간이 빨라졌다. 목표가 있으면 뇌는 '부서별로 따로 노는' 모드가 아니라, 과제에 맞게 네트워크를 재배치하는 '통합 팀' 모드로 전환되는 것이다.
심지어 장기 연구에서는, 52세에 목적의식이 높았던 사람들이 28년 후 80세에 전반적 인지 기능과 언어 유창성이 더 좋았고, 치매 발병 확률도 낮았다.
내가 과거에 노력해서 성공한 경험을 돌아보자. 시험 성적, 실험 결과, 논문 작성. 이것들은 내 시간과 집중력을 투입하면 직접적으로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역이었다. 물론 운도 있고 외부 변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더 하면 더 나아진다"는 인과관계가 비교적 명확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때의 목적은 내가 통제 가능한 과정에 꽂혀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 이 챕터를 3번 읽겠다" (통제 가능)
"이 데이터를 5가지 방법으로 분석하겠다" (통제 가능)
"매일 아침 30분씩 글을 쓰겠다" (통제 가능)
이런 목적들은 뇌를 효율 모드로 만들고,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배분하게 하고, 네트워크를 재배치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랑에서의 노력은 달랐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만들겠다" (통제 불가능)
"이번 주 안에 관계를 진전시키겠다" (통제 불가능)
"상대의 마음을 돌리겠다" (통제 불가능)
이런 목적들은 뇌를 효율 모드가 아니라 불안·통제·검증 모드로 만든다. 상대의 마음이라는 독립변수를 내가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에, 노력은 추진력이 아니라 마찰력이 된다.
결국 노력이 통하려면, 목적이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오늘 몇 시간 공부할지
어떤 말투로 대화할지
상대의 연락이 늦을 때 불안해하지 말고 내 할 일을 할지
관계가 안 풀릴 때 품위를 지킬지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시험 문제가 내가 공부한 범위에서 나올지
언제 기회가 올지
행복이 언제 찾아올지
ACT(수용·전념 치료)는 통제 불가능한 내면의 경험(생각, 감정)을 억압하려는 시도 자체가 고통을 키운다고 설명한다. 대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맞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훨씬 덜 고통스럽고 지속 가능하다.
우린 이미 다 알고 있다. 누군가를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행복을 좇을수록 달아난다는 것을. 간절히 원하면 오히려 더 멀어진다는 것을. 삶의 모든 곳에 이 역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왜 우리는 더 열심히 하려고 하는가? 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들면서 스스로를 소진시키는가? 아마도, 노력 말고는 다른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포기나 게으름과 동일시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이 보상하는 건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여유로운 사람이다. 여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여유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힘을 쓰는 지혜다.사랑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당겨오려는 노력 대신 내 태도와 품위를 지키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관계가 되면 더 건강하게 이어지고, 관계가 안 되면 덜 부서지고 빨리 회복한다. 일에서 여유로운 사람은 결과를 보장받으려는 노력 대신 과정을 충실히 하는 노력을 한다. 그래서 성공하면 더 만족스럽고 실패해도 배움이 남는다.
결론은 단순하다.
통제 불가능한 인생의 거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통제 가능한 단 두 가지 나의 행동과 반응만 다스린다.
아주 작은 개선을 매일 쌓아간다.
노력하되, 방향을 바꿔라.
결과를 통제하려 들지 말고, 과정을 선택하라.
상대를 바꾸려 하지 말고, 나를 선택하라.
행복을 쫓지 말고, 의미를 쌓아라.
게으른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해서 잃고 여유로운 사람은 쓸데없는 통제를 내려놓아서 얻는다.
진짜 노력은 더 세게 미는 게 아니라 밀어야 할 것과 놓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데 들어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든 성공이든, 결국 가장 오래 남는 건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라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질문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