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재능, 생기부 덕분에 찾았습니다!!

by 정희

전국 교사 백일장

나는 오랫동안 학교에 몸담았다. 교직 생활을 돌이켜보면 행복한 순간도 많았지만, 지금 내게 남은 가장 확실한 유산은 의외로 글쓰기다. 사실 교사가 되기 전의 나는 내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 서툰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교라는 곳이 나를 강제로 트레이닝시켰다. 바로 그 애증의 이름, 생기부 덕분이다.


생기부 철이 되면 교사들 앞엔 끝없는 빈칸의 향연이 펼쳐진다. 세특부터 행특, 자율, 동아리, 진로활동까지. 채워야 할 칸은 왜 그리도 많은지.

과목당 500자, 700자씩 꽉꽉 눌러 담아야 하는데, 이걸 수십 명 분을 써야 한다. 이건 창작의 고통을 넘어선 글 짓기 막노동이다.


특히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은 ''그 자체다. 한 학기에 200명이 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특성을 살려 다른 내용을 써내야 한다. 복사해서 붙여넣기도 안 통한다.

오죽하면 우리끼리 자조 섞인 농담으로 "이건 전국 교사 백일장이다"라고 했을까.


학기 말이 되면 교무실은 서로 얼굴 볼 새도 없이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며 타자 치는 소리만 요란하다. 주말 반납은 기본이고,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아이들을 관찰한 내용을 바탕으로 생기부를 기록한다.

그렇게 수십 년을 미친 듯이 썼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머릿속 생각이 손가락을 통해 물 흐르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지옥 같던 시간이 나를 글쟁이로 만들어준 셈이다.


물론 지금도 모니터 앞에서 눈을 비비며 생기부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후배 선생님들에겐 씨알도 안 먹힐 위로겠지만. 아마 속으로 "글 실력이고 나발이고 업무나 줄여줘!"라고 비명을 지르고 계실 테지.


오늘도 수십만 바이트와 싸우고 있을 선생님들, 진심으로 응원한다. 나는 이제 그 글 지옥에서 탈출해 유유자적 글을 쓰고 있다고 자랑하면, 아마 선생님들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부디 돌은 던지지 마시라.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