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앞두고 어머니 유골이 모셔져 있는 가족 납골당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번에는 예전에 주로 다니던 '자유로'가 아닌, 의정부에서 양주를 지나는 길로 가기로 했다. 사실 우리의 결정은 아니고 내비의 결정이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자유로'로 안내했을 텐데, 오늘은 이 길이 한가한지 이리로 이끌었다.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기분 좋은 흥분을 선사하지만, 평소와 다른 길로 가니 기분이 더 들떴다. 낯선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니 길이 조금 멀게 느껴졌다. 아마 그만큼 내 뇌로 들어오는 정보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의정부를 지나 양주 근처에 이르렀을 때, 지금은 양주에 살고 있는 동료 교사가 떠올랐다. 나이 차이가 꽤 나서 마치 딸 같은 동료였지만, 우리는 그 간격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아무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무엇보다 서로 '결'이 맞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학생이나 동료 교사와의 갈등에 부딪혔을 때 반응이 닮아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은 교사에게 늘 완벽함과 단정함을 요구한다. 무례한 학생의 말 한마디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혀도 '선생님이니까' 참아야 하고, 교무실에서도 내 부족함이 보일까 봐 늘 방어막을 치고 있어야 했다. 겉으로는 단단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피 흘리고 있던 그 긴장 속에서, 그 샘 앞에서만큼은 민낯을 보여줘도 괜찮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그 동료가 "샘이 더 엄하게 했어야지요" 같은 충고도, "아이들이 다 그렇지요 뭐" 같은 성급한 일반화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머물게 해 주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면 비로소 '결이 맞는다'는 감각이 왔다. 함께 있으면 내 날 선 감정들이 어느새 부드럽게 다듬어졌다.
학생에게 크게 상처받았던 어느 날 오후, 우리 둘은 함께 학교를 몰래 빠져나와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 자리에서 다 털어놓고 나면, 그 일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는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러고 나면 다시 교실에서 아이들을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좋았던 것은, 내가 만들어간 음식을 그 샘이 참 맛있게 먹어주었다는 것이다. 주변 교사들은 가끔 나에게 "샘은 잘 먹는 사람을 아주 좋아한다"며 놀리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내 음식을 반기며 먹어주는 그 샘이 유독 고마웠다.
이런 생각들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납골당에 도착해 있었다. 여름에 왔을 때는 풀이 무성해서 걷기가 힘들었는데, 겨울이 되니 풀이 많이 죽어 있었다. 곧 성묘 올 사람들을 위해 미리 풀과 길을 정리해 두었는지, 한결 걷기가 편했다.
그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 인생에도 사방이 가시덤불처럼 느껴져 한 걸음조차 내딛기 힘든 계절이 있다. 나의 여름날이 그랬다. 그 뜨겁고 무성했던 상처들 사이에서, 충고도 위로도 아닌 그냥 함께 앉아 커피를 마셔주는 것만으로 누군가 기꺼이 길을 내어 주었다.
어머니 납골당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돌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