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집은 귀신같이 사람이 살지 않으면 안다." 공간은 사람이 떠나면 죽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당진의 아미 미술관에 다녀오면서 죽은 공간도 다시 살아나는 방법이 있다는 것, 그것이 꼭 원래의 용도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미 미술관'은 폐교를 미술관으로 바꾼 곳이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건 운동장이었다. 늦겨울이라 잔디가 누렇게 말라 있었다. 아담한 운동장이 텅 비어 있었다. 남편은 개가 뛰어놀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텅 빈 공간도 그 자체로 자기의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로 쓰이는 교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천장 보드를 걷어내 층고를 높였다. 원래 이 방은 많은 아이들로 빼곡했을 것이다.
복도에는 분홍색 넝쿨 형태의 조형물이 천장에서 내려와 있었다. 책상과 의자 대신 하얀 나무 조형물들로 채워진 교실에서는 신비로운 요정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교실 한쪽에는 예전에 쓰던 실제 초등학교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책상 가운데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짝과 경계를 나누던 그 금.
나도 그랬다. 지우개 하나가 넘어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심한 날엔 지우개를 넘어온 만큼 잘랐다. 그 작은 책상 위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자기 영역을 지켰던가.
지금 보니 웃기면서도, 그 진지함이 조금 뭉클하기도 했다. 내 몸이 저 의자에 맞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초대 전시실에는 김희라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레이스로 만든 주먹이 하얀 액자 밖으로 뻗어 나오고, 가위로 찢긴 옷이 담긴 작품들.
웨딩드레스에나 어울릴 섬세한 레이스에서 주먹이 나오는 장면은 뭔가를 오랫동안 꾹 참아온 사람의 손 같았다.
카페 지베르니는 교문 쪽 붉은 벽돌 건물에 있었다. 전시실인 줄 알았다. 소품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긴 원목 테이블과 낡고 멋스러운 의자가 어우러진 공간.
차이(Chai)를 시켰다. 따뜻한 잔에서 카레와 후추 향이 올라오다가 끝에 달콤함이 남았다. 한쪽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좀 살찐, 게으르지만 호랑이의 풍모를 가진 고양이였다. 느릿한 걸음이 마치 이 카페의 소품 같았다.
바깥에서는 자개 모빌이 바람에 흔들리며 실로폰처럼 울렸다.
돌아오는 길에 당진 식당에서 우럭 매운탕을 먹었다.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남편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진 오면 꼭 여기 다시 오자."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오늘 이 폐교는 분명 살아있었다. 당진에서 보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