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地理非其地理 : 그 지리가 그 지리가 아니야

by 정희

오랫동안 지리 교사로 일했지만, 나는 지도 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현직에 있을 때는 교사가 지도를 모르면 안 될 것 같아 늘 지도를 외웠다. 방향 감각도 없어서 낯선 곳에 가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어디 가서 지리 교사라고 말하지 마라. 그렇게나 길을 자주 잃으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랄 것”이라고 농담을 던졌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가르치는 지리는 단순히 길을 찾거나 지도만 보는 게 아니야. 그 지리가 그 지리가 아니라고” 하며 반박하곤 했다. 요즈음은 길을 거의 잃지 않는다. 손 안의 지도, 스마트폰 덕분이다. 뭐든지 모르면 찾으면 되고 물으면 되니까.

정년퇴직 후 나를 홀가분하게 했던 것 중 하나는 더 이상 지도를 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주변의 동료 지리 교사들을 보면서도 ‘어쩜 저렇게 지도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싶었다.

그러던 내가 요즈음은 어디를 다녀오면 꼭 지도로 그 길을 확인한다. 현직에 있을 땐 지도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여서 일부러 피했던 것 같다. 반면 남편은 어디를 다녀오면 꼭 지도로 경로를 확인하며, 지식이 한 숟갈 더 늘어난 것을 행복해했다.

“여기부턴 임진강이고, 이 구간은 하천 구배가 어떻고…….”

쉼 없는 남편의 현장 강의를 듣다 보면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지리 교사는 나보다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아. 어쩜 이렇게 공간에 관심이 많아?”

남편과 나는 자주 서울 북쪽으로 여행을 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북쪽을 덜 선호하는 듯한데, 아마 휴전선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며 망설이는 사이, 우리는 그 텅 빈 도로를 전세 낸 듯 달린다. 그 단절의 선이 우리에겐 해방감을 준다.

며칠 전에도 파주 문지리의 한 카페에 들렀다.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넓은 논은 지평선이 보일 만큼 아득했다. 이곳은 북한은 보이지 않지만, 논은 민통선 안이다. 허가받은 농민들만이 약속된 시간에만 드나들 수 있는 땅. 사람의 발길을 엄격히 가로막은 그 통제가, 그 보이지 않는 힘이 평온을 지탱하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평탄한 논 위로 가끔 농기계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삼엄한 경계선 안에서 대지는 더없이 느긋하고 풍요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물줄기를 따라 난 길이다. 물가에는 수양버들 새순이 돋아나고 나뭇가지가 연두색으로 번지고 있었고, 둔치의 풀들은 여름날의 무성한 '초록의 숲'을 꿈꾸고 있었다.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철조망은 얼마 전 새로 교체했는지 아주 깨끗했다. 새로 개조된 철조망의 매끄럽고 짙은 초록빛이, 아직은 나대지인 논의 황토색과 섞이지 못한 채 이질적으로 서 있었다.

저 초소 안으로 밤이 찾아오면 누군가는 깨어 이 풍경의 정적을 감시할 것이다. 그 정적의 뒤편으로 자유로를 질주하는 차 소리가 날카로운 선을 그리며 밤의 공기를 가를 것이다.

임진강 물살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다 대동리 근처에 이르면, 강 너머 북한 땅을 볼 수 있다. 겨울철 북한의 산은 군데군데 흙바닥이 드러나 있다. 땔감으로 쓰려고 나무를 베어낸 탓일 게다. 저 민둥 한 자리마다 누군가의 겨울이 있었을 것이다. 추위를 버티려고 나무를 베어낸 손, 그 손이 봄이 오면 다시 씨를 뿌렸을 땅. 부모님이 두고 온 땅도 저 산 어딘가였을 것이다.

오두산 근처에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한다. 북녘 산의 민둥 한 흙빛을 담고 내려온 임진강 물과, 수중보에 가득 고인 한강 물이 여기서 섞인다. 이 합류점을 옛사람들은 조강(祖江), 할아버지 강이라 했다. 나는 이 이름을 교실에서 한 번도 가르친 적이 없다. 지도에는 없는 이름이니까.


부모님이 두고 온 땅의 빗물도, 그 땅의 눈 녹은 물도 언젠가 이 강을 지났을 것이다. 땅은 사람을 붙잡지 못했지만 물은 끝내 흘러왔다. 지도 위에서 이 지점은 그저 두 선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 이름으로는 다 담기지 않았다.


그 합류점을 지나 한강 상류 방향으로 난 길을 달려 집으로 향하는 길. 잘 닦인 둔치와 강물을 가두어 둔 수중보가 눈에 들어온다. 북녘의 메마른 산등성이와 대조적으로, 수중보가 찰랑찰랑 채워놓은 한강의 물결은 넘칠 듯 풍요롭다.

그래, 역시 ‘그 지리가 그 지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