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니

풀 먹인 이불과 마루의 통곡

by 정희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25 전쟁을 모두 겪은 분이었다.


형제가 네 명인 우리 집에서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를 외할머니 댁에 맡기곤 했다. 네 명을 한꺼번에 돌보는 건 너무 벅찼을 테니, 제일 큰 나를 외가에 보내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마루에서 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할머니와 이모는 나를 달래려고 빨간 구두도 사주고, 흰 바탕에 사슴이 그려진 주름 원피스도 사줬다. 그래도 내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이모는 그 원피스를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톰에게 입혔다. 하얀 털에 순한 성격의 믹스견이었는데, 옷을 입고 놀라 도망가는 걸 보고 나는 더 크게 울었다. 그렇게 예뻐해 줬는데도,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고 동생들과 놀고 싶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고작 며칠 집을 떠난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나와 달리, 할머니는 몇 번이고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는 것을.


할머니는 강한 분이었다.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숫자에는 밝아서 생일이나 기일, 돈 계산은 아주 정확했다.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아들을 낳았지만 남편은 소의 뒷발질에 맞아 죽고, 아들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시댁에서는 아들 죽인 재수 없는 며느리라며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친정에서도 구박을 받다가 다시 시집을 갔지만 그 남편도 오래 못 살았다. 그렇게 반복하다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전처가 있는 집에 세 번째로 시집을 갔다. 할머니는 그 전처의 수발을 들고, 까다로운 남편과 전처 자식들까지 보살피며 살았다.


본인의 자식도 낳았다. 네 명 중 둘째 아들은 어려서 잃었고, 전처 자식 둘과 본인 자식 셋, 다섯 아이를 키웠다. 꽃을 좋아하셔서 집엔 늘 식물이 가득했다. 엄마는 북한에서 살던 집을 동네 사람들이 꽃집이라 불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6·25 전쟁이 터지자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피란을 왔다. 부산 영도에 자리를 잡았지만 먹고살 길은 막막했다. 큰아들은 극장에서 영화 간판을 그렸고, 엄마는 영도다리 밑에서 성냥을 팔았다.


셋째 외삼촌은 미군부대에 취업했다가 좋은 미군의 도움으로 치과대학에 진학해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런데 군대에 갔다가 의문사했다. 사인은 아무도 몰랐다. 내가 다섯 살 쯤이었을 때다.


외삼촌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운동하던 모습, 면도 후 애프터셰이브 로션을 바르던 모습. 파란 유리병에 담긴 하얀 로션에서 꽃향기가 났다. 봄에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좀 더 자란 뒤 어른들 사이에서 들은 말이 있다. 달이 뜨면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밤새도록 울었다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혼자서.


할머니는 양계장을 하며 닭과 계란을 팔아 이모를 대학에 보내 교사로 만들었다. 본인이 배우지 못한 한을 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던 거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격한 분이기도 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깊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내가 음식이 맛있다고 하면 여자가 음식 맛을 따지면 안 된다고 야단을 치셨다. 홍역으로 형제들이 모두 아파 할머니 댁에 요양을 갔을 때는, 항아리에 보관하던 사과를 남동생들에게만 주셨다. 딸인 나와 여동생은 못 먹었다. 그 서운함은 오래 남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풀 먹인 이부자리를 펴서 함께 잠을 자던 기억은 따뜻하다. 바스락거리던 소리, 빳빳한 이불의 감촉. 지금도 여행 중 호텔에서 풀 먹인 이불을 만나면 그때가 떠오른다.


밤마다 들리던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마루에서 홀로 울던 할머니의 눈물이 마르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