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

인생의 터닝포인트

by 애나풀리

터닝포인트. 인생의 흐름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지점일 것이다. 살아온 시간을 면면이 느껴봤지만 내게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번뜩 떠오르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속에 차갑게 굳어있던 어떤 것이 뜨거운 액체가 되어 내면의 방향타를 건드려준 것이 있었다. 지난겨울, 예상치 못한 돌연 임신으로 엄마가 될 뻔했지만 아기는 원인 모를 이유로 금세 나를 떠나갔다. 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지금 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임신을 경험한 후 내 일에 대한 막연했던 불안은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현재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나는 매일 저녁 생방송을 한다. 프리랜서로 방송 횟수마다 페이를 받으며 연차나 휴가는 당연히 없다. 출산을 하러 가면 최소 2주간 방송을 하지 못하는데 그 자리를 메꿀 수 있는 뾰족한 수도 없다. 누군가 대신해주지 못하면 방송은 펑크가 나고, 내가 돌아올 자리는 없는 것이다. 출산은 곧 내게 실직을 의미하기도 했다. 방송이 아닌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수없이 되물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고 있던 때에 이 책을 만났다. '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김수민 작가의 에세이다.


김수민 작가를 만난 건 2018년이었다. 당시 나는 아나운서 스터디를 10개씩 하며, 내 얼굴이 TV에 나오기만을 꿈꾸고 있었다. 그 해에 SBS 공개채용이 있었고 나는 어김없이 불합격을 마주했다. 김수민 작가는 스물두 살, 역대 최연소 아나운서로 내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SBS에 입사를 했다.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던 나는 합격자 간담회에서 김수민 아나운서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맨 얼굴에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별처럼 빛이 났다. 즉흥적인 질문 세례에도 울림을 주는 대답으로 어린 나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시기와 질투로 뒤섞여 있던 내 시선은 어느새 동경과 존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간담회를 빠져나오던 그 순간부터 줄곧 그녀를 좋아하고 응원했다. 하지만 김수민 아나운서는 4년 만에 퇴사를 감행하고 결혼과 출산을 선택했다. 그녀는 새로운 꿈을 품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로스쿨 시험에 도전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새벽마다 시험공부를 하고,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끊임없이 찢고 나아갔다. 나를 놓지 않는, 끝끝내 나로서 살아가는 엄마. 어쩌면 내가 그렸던 엄마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김수민 작가는 남편과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있다. 이 짧은 한 문장 뒤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전쟁 같은 나날들이 쌓여 있었을 것이다.


머지않아 다시 임신을 하고 엄마가 될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눈물겹게 행복하겠지만 그 행복 아래 나의 존재는 어떻게 피워낼 수 있을까. 눈물이 차올라 수십 번 책을 덮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한 뒤에야 나는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뜨거워진 마음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어줬다. 다시 아기를 갖게 되더라도, 언젠가 엄마가 되더라도, 나 자신을 놓지 않고 끝까지 나로서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그 첫 발걸음으로 나는 방송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뜻밖의 탈선에도 희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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