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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11. 2023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과 같이 타기 싫은데요

"추운데 지퍼 잠그지."


"원래 지퍼 잠그는 거 싫어해요."


"왜? 답답해서?"


"네."


"잘 가. 좋은 하루 보내."


"안녕히 가세요!"






지어진 지 32년 된 아파트 별빛마을 4단지. 그때쯤 지어진 이 마을의 '동기 마을'들은 대부분 이런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달래마을, 목련아파트, 까치아파트... 푸르지오, 래미안, 롯데캐슬처럼 브랜드 아파트 단지와 비교했을 때 이름도 물론 촌스럽지만 시설도 단출합니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공동 현관도 없어 잡상인이든 배달원이든 방문객이든,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 이 아파트 11층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입구 쪽에 비치는 실루엣.



"잠시만요~"



평소였다면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3초를 기다리기 어려워 닫힘 버튼을 눌렀겠지만 마침 카카오톡을 보내느라 양손이 바빠 그러지 않고 있었어요. 운이 좋은 실루엣을 기다리며 열림 버튼을 누릅니다.





"감사합니다."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실루엣은 꾸벅 인사를 하고 안쪽 구석으로 들어갑니다. 꼬마가 엘리베이터에 안전히 들어온 것을 확인하면서 닫힘 버튼을 눌렀습니다.


"오늘 날씨 춥다. 추운데 지퍼 잠그지."


"원래 지퍼 잠그는 거 싫어해요."


꼬마는 요즘 넷플릭스 최고 흥행작인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의 딸 '하예솔'처럼 그야말로 사슴같이 큰 눈을 가진 예쁜 여자 아이였습니다. 목소리와 발음마저 정확하고 청아해서 진짜 아역배우인가 의심을 했어요.


"왜? 답답해서?"


"네."


"잘 가. 좋은 하루 보내."


"안녕히 가세요!"


엘리베이터가 금방 11층에 도착하는 바람에 아쉬운 대화를 마무리하고 내려야 했습니다. 진심으로 아이가 좋은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안부 인사도 덧붙이고 헤어졌어요.



병원이나 마트 엘리베이터에서는 서로 인사하지 않습니다. 신혼 초에 살았던 나 홀로 아파트에서는 입주민끼리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한 목례를 살짝 건네고는 최선을 다해 각자의 휴대폰을 봤어요. 가끔은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 건네주는 분께는 기어들어가는 개미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겨우 대꾸하고요.



더 심하게는 꼬마와의 일처럼 만약 입주민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탈 상황이 될 것 같으면, 저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입주민이 타고 간 것을 확인하고 1층에 들어가서 새로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누른 적도 많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에선 2층에 살고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탈 일 조차 없고요.



그렇지만 그날은 꼬마가 예뻐서였는지 아니면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요청하는, 나는 감히 낼 수 없는 용기를 낸 꼬마가 부럽고 멋져서였는지 괜히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진짜 추운 날이었는데 하얀색 롱패딩ㅡ꼬마에겐 롱패딩이었지만 제게는 숏패딩 길이가 될ㅡ의 지퍼를 잠그지 않은 아이가 정말 걱정되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요.




인간이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는 약 1.2m라고 합니다. 대략적으로 양팔을 벌렸을 때의 길이지요. 엘리베이터는 가로 1.2m X 세로 1.2m보다 작은 크기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을 감추려 휴대폰을 보고, 최대한 시선을 피하고, 광고판을 응시하거나 바닥으로 눈을 떨굽니다.




어른이 될수록 이 거리는 1.2m보다 더 넓어지는 것 같은데요. 순수한 영혼의 아이들은 마치 내가 꽁꽁 싸맨 이 사회적 방어막을 비눗방울 터뜨리듯 아주 가뿐하게 톡! 하고 무장해제 시킵니다. 악의 없는 그들의 손짓에 무지갯빛이 퐁! 하고 눈앞에 흐드러지며 방어막은 어느새 향기만 남기고 없어지지요.



기술은 발전해서 공동현관을 만들고, 기다릴 필요가 없게 집 안에서나 어플로 엘리베이터 호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현관이 한 번의 '단절'을 만들고, 기다림이 없기에 나의 이웃과 잠시간 같은 공간에 머무는 '약한 연대'가 사라집니다. 기술은 사람을 향하고 있다지만, 어쩔 수 없는 인간 소외라는 결과가 부산물처럼 남기도 하죠.



여태까진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과 같이 타기 싫었는데요, 꼬마가 건넨 열린 세계로의 초대에 응답하는 바람에 이제는 인사를 건네봐야겠습니다. 아이도 하는데 저라고 못 할 이유 없잖아요? 용기를 가르쳐 준 사슴눈 꼬마 덕분에 저야말로 좋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용기소녀가 패딩 지퍼를 잠그지 않아도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내길 바랍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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