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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Mar 08. 2023

세차 괴물


우리 아빠 핸드폰 번호 뒷 네 자리는 3869이다.


이 번호는 아빠가 처음으로 가졌던 자동차의 넘버판 번호이기도 하다.


내 기억 속 우리 집 첫 차는 소나타인데, 소나타 전에 진짜 첫 차가 있었다고 한다.


하얀 색깔 무슨무슨 차. 아마도 현대차였겠지?


그 차량의 브랜드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은색 3869 구형(아마 구구구구구구형 정도?) 소나타를 우리 아빠는 무척이나 아꼈다.


이상하게 집이나 방은 별로 치우는 것과 거리가 먼 아빤데 차는 끔찍이도 아꼈다.


먼지떨이개로 항상 먼지를 털고, 좌석 시트도 항상 올바르게, 차량 안에 잡다한 것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세차도 어찌나 광이 나게 하는지. 어릴 적에 아빠를 따라 세차를 가는 날은 항상 기분이 좋았다.


왜 세차를 가는 날이 그렇게 설레고 날씨가 항상 좋았었는지를 이제와 운전자가 되어 보니 깨달았다.


보통의 자동차 주인은 향후 며칠 동안은 비나 눈 소식이 없을 때 세차를 한다.


시간, 돈, 노력을 들여 세차를 했는데 다시 눈이나 비가 오면 그 수고들이 모두 수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빠도 보통의 운전자들처럼, 앞으로 날씨가 좋다고 예상되는 날 세차를 했을 것이기에 아빠를 따라 세차 가는 날은 그리도 날씨가 좋았던 거겠지.







아빠는 보통 휴일 오전에 세차를 가곤 했기에, 종종 아빠한테 부탁을 하곤 했다.



아빠, 세차 언제가?
갈 때 나 꼭 깨워서
같이 가야 돼.
혼자 가지 마.



늦잠을 자다가 아빠가 나를 두고 홀랑 세차를 하러 갈까 봐 몇 번이고 확답을 받아냈었다.


아마 아빠의 자동차 사랑이라면 손세차도 분명 자주 하셨을 것 같은데, 손세차는 생각보다 고된 노동이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럴 땐 나 몰래 가서 하셨을 것 같다는 추론을 해본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세차란, 주유소에 딸려있는 세차 기계 터널에 들어가서 하는 자동 세차를 말하는 것이다.


자동 세차는 나와 언니에게는 단순한 car wash가 아닌 하나의 모험이었다.


자연농원(지금의 에버랜드를 예전엔 이렇게 불렀답니다. 어린이 청소년 여러분!)은 지금도 비싸지만 그때도 상당히 비싼 티켓값을 자랑하는 대기업의 가족 복합 문화 놀이동산이었다.


그래서 자주 가진 못했는데, 뭔가 탐험을 하는 (지금의 아마존이나 신밧드의 모험 정도?) 놀이기구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데 이게 세차를 하면 딱 그런 느낌이다.


우선 어두컴컴하고,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기계가 있고, 무서운 동작음이 크게 울리고, 그러다 비누 거품이 분사되면 앞이고 옆이고 시야가 차단되고, 온갖 털이 달린 세차 괴물(언니와 나는 이것을 몬스터 주식회사 설리라고 불렀다.)이 붕붕 회전 운동을 하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일련의 과정들이 모험처럼 다가왔다.



이미지 출처: 디즈니 영화 몬스터 주식회사




정글 모험을 떠나는 것 같아서였는지 언니와 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세차가 시작되면 퀴즈 탐험 동물의 세계 OST처럼 "우~~~ 와~~~ 우와~~!! 우 와~~!!" 하며 손바닥을 쫙 펴서 입 앞을 막았다 뗐다 하며 타잔 흉내를 냈다.


고래의 뱃속으로 꿀꺽 삼켜진 제페토 할아버지와 피노키오처럼 세차 괴물의 몸속으로 들어온 기분.


그 뒤로 깨끗한 물로 헹굼을 거치면 마지막 단계인 헝겊 수술들이 지나가며 물기를 닦아주는 것으로 세차는 마무리된다.


그 헝겊 수술들이 너무 더러워 보였기에 지금 이게 세차를 하고 더러운 것으로 다시 닦는 게 괜찮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다행히 지금 내가 이용하는 주유소의 자동 세차 기계는 헝겊 수술 대신 강한 송풍기(백화점 화장실에서 손 말리는 기계처럼)로 물방울들을 내려보낸다. (아직도 근데 헝겊 수술이 있는 세차장도 있나요? 궁금하네요.)


세차를 마치고 나오면 아빠는 손걸레로 연신 차량을 닦아냈고, 우리는 아빠를 도와 자동차 바닥에 깔려 있는 발판들을 꺼내 탁탁 쳐서 먼지를 털어낸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복도식 아파트 19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엄마가 만드는 점심 냄새가 솔솔 났다.


그땐 모두 집 현관문을 열고 살았으니까.


어릴 적 아빠랑 함께 하던 세차는 이렇게 재밌었는데, 지금은 세차를 하기 위해 자동차 줄을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지루한지.


지금도 미세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자동차를 보면 얼른 세차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 지금 날씨 예보를 찾아보니 일요일까지 간헐적으로 비 소식이 있다.


이렇게 세차 숙제는 '합법적인 이유'로 다음 주로 미뤄야겠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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