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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28. 2023

냄비와의 이별

아침에 일어나서 뭘 먹을까 고민합니다. 


냉장고에는 각종 음식이 가득한데 먹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마 매번 옷을 사지만 옷장을 열면 입을 옷이 없는 이치와 같은 걸까요.



냉장실에는 1개 450원짜리 순두부 6개, 오징어진미채가 있고요.


냉동실에는 오뚜기 동그랑땡 1+1, 엄마가 해준 손만두, 냉동 시카고피자, 계란초밥, 냉동사각삼겹살, 육전용 홍두깨살 등이 있습니다.


냉기가 인기가요 발라드 무대 안개효과처럼 훌훌 빠져나갈 동안 냉동실 문을 부여잡고 식재료를 째려봅니다.


무래도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것부터 털어야 하겠습니다.


불규칙한 모양으로 각이 안 사는 엄마표 손만두를 골랐습니다. 


원래는 맵칼하니 맛있는 만두를 빚어온 엄마.


이번 만두는 조카가 태어나고 3년 만에 처음으로 할머니 만두를 맛봐야 해서 그런지 하나도 안 맵고 밍밍합니다.


아쉽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나하나 빚은 만두를 먹기로 합니다.





우리 집에 여러 냄비가 있는데 이 특대형 양은냄비는 찜기 용도로 쓰입니다.


가리비를 잔뜩 사서 찌기도 하고, 꼬막을 키로로 가져와 데칠 때도 쓰고.


삼발이를 놓고 젖은 면포를 덮어서 만두를 찌기도 합니다.



만두는 구워도 맛있고 국을 끓여도 맛있지만 저는 찐만두가 제일 좋아요.


오늘도 삼발이를 마련해서 만두를 찝니다.


뜨거운 김에 사우나를 15분~20분 하고 나온 만두를 방 창을 열어 금같이 차가운 바깥바람으로 살짝 식히면 겉에 피가 먹기 좋게 굳어요.


저녁때 근사한 식사를 하기로 해서 아침 겸 점심은 적당히 먹기에 만두가 딱이라 생각했어요.


냄비에 물을 두 컵 넣고, 삼발이를 세팅하고, 면포를 적셔 깔고, 만두를 서로 붙지 않게 간격을 띄워 배열하고, 면포 끝으로 만두를 덮어준 뒤 뚜껑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불을 올리고 평일동안 제 멋대로 흐트러진 집을 정리합니다.


어제 건조기에서 꺼내 옷방에 널브러뜨린 옷가지 정리. 서재방에 야옹이 화장실 주변 정리. 식탁 닦기와 아일랜드 잡동사니 정리..



한참을 하다 보니,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요?
 제 가슴이,
아니, 만두가 타고 있잖아요!!!!



만두가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사이즈, 대왕보스 양은냄비가 분노했지요.


놀라서 뚜껑을 여니 탄 냄새에 까만 냄비 바닥..

제 마음도 냄비와 같이 새까맣게 탑니다.





우선 집 안에 모든 창문을 엽니다.

한파 속 난데없는 혹한기 훈련입니다.

10분을 열어두니 냄새가 안 나고 너무 춥길래 닫았거든요.


닫았더니 다시 냄새가 올라와서 점퍼를 입고 다시 창문을 열었습니다.


참. 한눈 판 대가는 이리도 큽니다.


그 만두 찌는 15분을 못 봐서.

아니 최소한 알람이라도 해둘걸.

아니 그냥 물을 애초에 넉넉하게 넣을걸.


 열전도율이 매우 높은 양은냄비에게,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양은냄비에게 턱없이 적은 양의 물을 주어서 화가 났나 봅니다.


냄비는 잘못이 없습니다.


내 탓입니다.


만두에 탄 내가 배면 못 먹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니었습니다.


온 창문을 열어둔 덕에 만두 겉 피는 쫀득하게 잘 말라갑니다.


만두에게 욕창이 생기지 않게 뒤집어줍니다.

밑면도 꼬득하게 잘 마르라고.

내 관심을 받지 못해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

미안합니다.

그래도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3중 코팅 최고급 냄비가 아닌, 동네 다이소 짝퉁 생활용품 전문점에서 만팔천 원 주고 산 싸구려 양은냄비입니다.


검댕을 닦아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안하다 냄비야.

너의 마지막이 이렇게 얼룩진 모양일 줄은 몰랐는데.


검색해 보니 양은냄비는 분리수거가 된답니다.

고철에 두면 된다 해서 바로 버리러 갑니다.

집안에 두면  냄새가 마치 냄비의 눈물처럼 새어 나오는 것 같아서요.


고철 분리수거함에는 각종 음료수 캔들로만 가득합니다.


"날 두고 어딜 가는 거야?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여기엔 온통 캔만 가득해!"


조그마한 캔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커다란 지름 26cm 양은 냄비가 들어가니 마치 키즈카페에 들어간 걸리버 같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냄비와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탄 냄새가 나는 집.

면포가 포근히 감싸준 덕인지 검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이 매끈히 식어가는 만두들.



아까까지만 해도 3구짜리 가스레인지에 육중한 자태를 뽐내며 존재감을 과시하던 양은냄비는 갔습니다.


이사를 갈 때 집에 정이 들어 눈물이 찔끔했었는데, 손길이 많이 닿은 물건이라 그런지 냄비와의 이별도 쉽진 않네요.


그렇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별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요. 람은, 사랑은, 그런 겁니다.


얼마 후면 보스 양은이 모두 잊은 채 해피콜을, 키친아트를, 테팔을 사러 가겠죠.


그렇지만 그전까지는 이별한 양은이와 충분한 마음 정리를 할 생각입니다.



항상 좋은 요리를 만들어준 양은이...


부디 다음번엔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과 함께하길... RIP...!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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