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한 식단표

aka 짙은 기대감, 투쟁의 결과, 죽지 않겠다는 의지

by 김이로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칙칙한 색깔의 재생지에 인쇄된 급식 식단표에 형광펜칠을 깨나 했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도 이런 식단표를 받을까? 잘 모르겠다. 네모칸 월화수목금 아래에는 그날그날의 메뉴가 적혀 있었다. '수요일은 다 먹는 날'이라는 뜻의 수다날에는 특히나 맛있는 메뉴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치 비빔밥이나 돈가스 등이 수다날의 단골 메뉴였다.



담임 선생님이 식단표를 나누어 주시면 아이들은 좋아하는 메뉴에 동그라미를 치거나 형광펜을 칠해두었다. 수업을 듣다가 지루해지면 한 번씩 책상에 붙여둔 식단표를 보고 군침을 다시곤 했다. 코팅이 벗겨지고 중간중간이 패인 나무 책걸상 냄새가 나는 교실에서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급식 식단표에서는 하루 24시간 중 기대감의 농도가 가장 짙은 냄새가 났다.




내가 전에 다녔던 회사는 식품회사였다. 제조도 하고 단체급식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우리 팀은 마케터인 나를 포함하여 기획, 영업, 영양사, 조리사가 각각 한 명씩 모여 도시락 배달 신사업을 연구하는 팀이었다. 사무실에는 주로 나와 영양사 동료만이 있었다. 나머지 인원들은 사무실 외의 현장에 있는 일이 잦았다. 나는 완성된 요리를 촬영하고 온라인용 상세 설명 페이지를 만들고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 두 칸 옆의 자리에 앉은 영양사는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식단표를 짜고 식자재 발주를 하며 보냈다.


가끔 나에게 먹고 싶은 반찬이 없냐고 묻기도 했다. 한 번은 계란말이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식단에 이미 찜닭을 넣어서 안 된다고 했다. 찜닭은 짭조름한 간장소스이고 계란말이는 심심한 맛의 부침요리인데 무슨 상관이지? 하나의 식단에 있으면 왜 되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닭과 닭에서 나온 계란은 한 식단에 넣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고 한다.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을 골고루 넣어야 해서 식재료를 겹치지 않게 넣는 것이 영양사들의 규칙이라고 했다.


구내식당에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이 없으면 속으로 투정을 하기도 했고 때론 아무 생각 없이 밥을 먹었었다. 영양사와 함께 일을 해 보니 그 식단들은 제철 식재료와 영양소에 대한 경우의 수를 실컷 고민한 투쟁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매 일요일마다 다가오는 주의 우리 집 식단표를 짠다.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식재료들의 리스트와 먹고 싶은 메뉴를 쭉 적는다. 빨리 소진해야 하는 재료들을 조합해서 요리를 생각해낸다. 부족한 재료는 일요일 저녁 장을 봐 온다. 직접 요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까지는 식단 짜는 이 시간이 즐겁고 몹시 힐링된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죽을 결심을 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군가 앞으로의 계획이나 미래지향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으면 위험한 신호일 수 있으니 잘 관찰하라는 자살방지위원회의 캠페인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식단표를 적는 행위는 단순히 식재료를 없앨 계획을 짜는 것이 아니라 살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행위이다. 죽을 생각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맛을 느끼겠다는 다짐이다. 기억하자. 재생지에 인쇄된 급식 식단표, 회사 구내식당 앞에 적혀있는 오늘의 메뉴, 아무 메모지에나 휘갈겨 적은 우리 집 식단표는 모두 이다지도 숭고한 일임을.




21.06.25 다음 메인, 카카오톡 # 탭에 소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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