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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Feb 12. 2023

만약 로봇이 내게 죽여달라 요청한다면


초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행사 기억나시나요?

고무동력기나 물로켓도 만들고 포스터나 글짓기를 했던 날이요.

매년 4월 21일, 그날에 우리가 그리고 썼던 대로 세상은 닮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여름휴가로 우주여행을 가는 날은 오지 않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스페이스X를 설립하고 민간 우주 탐사의 지평을 넓히고 있고요.

언제 어디서나 서로 통신할 수 있으며 사진도 찍고 노래도 들을 수 있는 커다란 컴퓨터를 배낭처럼 메고 다니는 그림 속 우리의 모습은 간편한 스마트폰 하나로 외관이 바뀌었을 뿐 현실이 되었습니다.






로봇도 과학의 날 행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였습니다.

그때 그리던 로봇은 대부분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양철 나무꾼이나 동화책 <로봇 소스>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는데요.



출처 : Wikipedia - The Wizard of Oz / YES24 - 로봇 소스




모양은 많이 다르지만 2023년 현재 수술용 의료 로봇인 인튜이티브社의 <다빈치>는 전 세계적으로 1000만 건 이상의 수술에 사용되었고요.

신당동 떡볶이 타운이 있는 아이러브 신당동 떡볶이 가게에 가면 SK쉴더스의 서빙로봇 <딜리 플레이트>가 냄비를 싣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에 다가옵니다.

우리가 '미래의 모습'으로 상상했던 많은 것들이 내 피부에 체감하는 현재에 흐르고 있죠.



출처 : 인튜이티브 다빈치







Science Fiction, 공상과학이라고 부르는 SF 장르의 영화나 소설을 보면 극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로봇은 인간을 해할 수 없다.



이 전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작품들은 아주 많습니다.

로봇이 우리를 해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대부분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답변을 할 것입니다.

인간을 해치는 로봇을 즉시 파괴한다, 앞으로 로봇을 생산하지 않는다, 로봇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등...



그럼 이제 질문을 바꿔보죠.



만약 로봇이 당신에게
죽여달라 요청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는 그 로봇은 언어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외모는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로봇이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로봇은 우리 인간이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눈물을 흐르며 절규하는 모습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김정혜진 작가의 2017년 SF 중단편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에 등장하는 장면이자 질문입니다.

소설은 먼 미래에 요양병원에서 식물인간을 돌보는 간병 로봇이 자신의 돌봄 대상인 두 명의 사람, 바로 환자와 환자의 보호자 중 누구를 살릴 것인지 고뇌하는 내용입니다.

지난주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관내분실> 속에서 읽게 되었는데 긍정적인 의미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몹시 흥미롭게 읽어서 검색해 보니 해당 소설은 2020년에 MBC에서 방영한 8부작 시네마틱드라마 SF8에서 1부 <간호중>으로 제작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OTT 서비스 WAVVE에서 볼 수 있어서 바로 시청을 완료했습니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몇 가지 설정(주인공들의 성별 등)이 바뀌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출처 : 다음 영화 간호중 포토



극의 막바지, 죽여달라는 로봇의 요청에 신부님(수녀님)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직접 책이나 드라마를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저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에겐 로봇을 죽일 용기가 있을까요?

로봇이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 해도 그럴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운동회날 학교 앞에서 500원에 사 온 병아리를 집에서 키웠습니다.

어느 날엔 실수로 급하게 돌아서다가 병아리가 발에 차인 적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병아리가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아파하며 삐약 하고 비명 소리를 내던 병아리에게 너무나도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만약 제가 지금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먼 훗날 병을 앓게 된다면요.

아파하는 고양이를 동물 병원에 입원시켜야 할까요?

전문적인 의료진이 최선의 조치를 하겠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냄새가 나는 집이 아니라 낯설고 보호자가 없는 병원에서 고양이는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 고양이를 집에서 돌봐야 할까요?

고양이가 떠난 뒤 '혹시 병원에 갔다면 살았을 텐데 내가 집에서 돌보는 바람에 더 일찍 떠난 것은 아닐까' 스스로 자책하지는 않을까요?



인간은 나약합니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요.



로봇이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참 기쁜 일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슬플 것 같습니다.

로봇이 발전함에 따라 로봇 윤리는 필연적으로 정교해지겠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로봇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다루는 가이드북도 발달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로봇에게 저런 요청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아마 과학의 현업에서, 철학과 인문학의 탐구 속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의 허구 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제 사유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도 뚜렷해지기를 바라봅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SF #TRS가돌보고있습니다 #간호중 #SF8 #김정혜진 #과학철학 #김정혜진 작가 SF소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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