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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Mar 09. 2023

필링 도넛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나요?


회사를 다녔을 때와 지금 강사로 일하고 있을 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보람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 보상이 주어지면 그건 보람이라기보다는 '인정받았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내적 보상보다는 외적 보상의 형태로 다가왔다.




도넛에 비유해서 말해보자. 


입사 시의 나는 그냥 튀겨내기만 한 기본 도넛이다.


회사에서 일하며 성과를 '인정'받으면 "겉에" 슈가 코팅을 덧입힌 반짝반짝한 글레이즈드 도넛으로 변신을 다.


달콤한 향기로 주변 도넛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찾는 인기 있는 글레이즈드 도넛.


반면 강사로 일하면서 나는 필링 도넛이 된 기분이다.


'감동받는' 순간이 종종 있다.


참 역설적이다.


가르쳐'주는' 직업인데 돈 말고 감동도 '받을' 수 있는 직업이라니. 


필링 도넛.


겉은 반짝이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지만, 그 안을 갈라 보면 딸기잼이든, 슈크림이든 달콤한 필링이 "속에" 가득 든 필링 도넛. 


내적 보상이 켜켜이 쌓이는 직업.


회사원보다 강사가 낫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잘 못하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다가 다행히, 어쩌다, 우연히, 잘 맞고 좋아할 수 있게 된 일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는 반대로 강사를 하다가 회사원이 되어 더 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의외의 상황에 마주할 때가 있다.


바로 나에 대한 학생의 피드백.


수업 시간에 아무리 말을 걸고 질문을 해도 일언반구 대답은 커녕 끄덕이거나 도리도리도 안 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럼 내 속은 터진 도넛이 된다.


그렇지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윽박을 지르면 학생은 그 상태 그대로 얼린 도넛이 되는 걸 잘 알기에 최대한 아이의 이해상태를 살피며 수업을 진행한다.


'그래, 대답하기 싫구나. 이해한 건 맞니? 그럼 대답 대신 지금 내가 설명한 걸 풀어보거라.' 하는 속마음을 가지고 예제 문제를 풀린다.


아이가 잘 풀면 넘어가면 되고, 버벅거리면 다시 설명하면 되니까.





로봇도 울고 갈 무반응, 무감정 학생 한 명이 그만두던 날이었다.


고2 학생이었는데, 실용음악과 진학을 준비하던 학생이다.


학교마다 입시곡, 스타일이 다르니 여러 학교 중에서 지망하는 학교를 추리니 해당 학교들에서는 영어 성적을 보지 않아 그만두게 된 상황이었다. 


조용하고 반응 없던 학생이기에 그만둘 때도 학생은 그저 꾸벅하고 인사하고 나 뿐이었다.


"다미(가명)야, 잘 가고 음악 열심히 해서 꼭 영화 음악감독 꿈 이루기 바라~"


아이는 기어가는 개미 목소리로 "네에..." 대답하고는 학원을 영영 떠났다.


그리고 그날 밤.





이 카톡을 받고 울컥했다.


내가 다미(가명)에게 특별하게 무언가를 해 준 것이 있나?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가르치고, 똑같이 인사했을 뿐인데...


나는 이 메시지에 감동도 했지만, 동시에 다른 감정도 들었다.


그 감정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나 스스로는 다미(가명)에게 크게 무언가를 해 준 것이 없다고 느꼈는데, 이 무반응 소녀는 이렇게 긴 메시지를 보낼 만큼 나에게 무언가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준 사람은 없는데 받은 사람은 있다.


그 말인즉슨 내가 무의식 중에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학생들의 마음에는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두려움.


내 말 한마디가 어떤 학생에겐 크나큰 상처가 될 수도 있겠구나.


내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겐 엄청난 위로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 메시지는 나에게 앵커, 닻과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에 임함에 앞서 유명한 책 제목처럼 나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마음을 다잡는다. 


나의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라운드에 서는 손흥민 선수와 아이스링크에 서는 김연아 선수가 기도를 하듯, 혼자만의 의식을 치른다.



'나는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마주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덜 지루하고(안 지루할 수는 없다 ㅎㅎ) 머릿속에 남는 수업을 하겠습니다. 나는 지식을 전달하는 학원강사지만 아이들의 꿈과 생활에도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다미와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카톡 프로필이 가끔 업데이트되어 살펴보면 즐거운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또래 학생들처럼 친구들과 예쁜 척을 하며(예쁜 척 안 해도 그저 예쁜데!) 네 컷 사진을 찍거나 한다.


아마 다미는 모를 것이다.


내가 다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다미도 나를 그냥 튀긴 도넛에서 달콤한 필링 도넛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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