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여름휴가를 다녀오지 못했기도 했고 갑자기 시간이 남아돌아서 기분전환 겸 10박 11일로 남도 여행을 계획했다.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 남자 친구와 함께 군산-해남-여수-하동-남해-통영-안동을 거쳐 다시 집으로 오는 기나긴 여행이었다. 전국 3대 빵집이라는 군산의 이성당에서 단팥빵을 먹고, 해남에서는 난생처음 닭 회를 맛보고, 여수 밤바다 포차에서 장범준 노래를 들으며 삼합에 소주 한 병을 기울였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맛볼 수 있는 토종닭 한상차림. 신선한 닭회외 닭주물럭 등이 나온다.
여수밤바다포차 해물삼합.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하동에서는 잠만 자고 남해로 건너갔으며 통영에서 질 좋고 값싼 회를 잔뜩 먹어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아침, 통영에서 멍게비빔밥과 꼬막비빔밥으로 속을 든든히 채우고서 마지막 여행지인 안동을 향해 길을 나섰다.
통영의 멍게비빔밥과 꼬막비빔밥
통영에서 출발할 때 조금씩 내리던 이슬비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이내 두꺼운 장대비로 모습을 바꾸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의 속도와 도로를 가르는 자동차의 속도가 만나 빗소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글을 올리는 오늘도 비가 왔다
자동차 블루투스에 휴대폰을 연결해서 듣고 있었던 90년대 인기가요 노랫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볼륨을 키우고 싶었지만 바깥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왠지 위험할 것 같아서 노랫소리도 아니고 빗소리도 아닌 우당탕탕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달렸다.
통영 출발지에서 안동까지는 3시간 13분이 걸린다고 나와 있었다. 1시간 조금 넘게 달렸을 때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남자 친구―현 남편이다―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수석에 앉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던 나는 운전하던 남자 친구 쪽으로 시선을 보내다가 자동차 앞 유리에 괴상한 모양의 물체를 보고 말았다.
검은색 플라스틱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ㄱ'자 모양으로 뒤틀려서 미친듯한 속도로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 까딱까딱 움직이고 있었다.
출처 : MBC 복면가왕
그건 바로 와이퍼였다. 부러진 와이퍼.
"으악! 이게 뭐야?"
"와이퍼가 부러졌나 봐. 와 이거 앞이 안 보이는데 어쩌지?"
"어떡해. 갓길에 세울 수 없어?"
"여기 갓길이 없는 구간인 거 같은데.."
"우선 비상 깜빡이 켜고 맨 끝 차선으로 가자. 내가 근처에 휴게소 있는지 한 번 찾아볼게"
휴대폰으로 찾아봤지만 가장 가까운 휴게소조차 한참을 더 달려야 도착할 수 있었다. 와이퍼가 고장 나 전방 시야 확보도 어려운 상태에서 혹시나 부러진 와이퍼가 날아가 다른 차량에 부딪히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것 같아 우선 고속도로에서 나오기로 결정을 했다.
"고속도로 출구에서 가까운 카센터 좀 찾아 줄 수 있어?"
"찾아볼게. 근데 오늘 토요일인데 카센터가 많이 닫았을 것 같아."
"그럼 가까운 마트로 찾아서 네비 찍어줘. 마트에서 바꾸면 될 것 같아."
"알겠어."
통영에서 안동 사이 어디쯤,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로 첫 번째 고속도로 출구를 찾아 나오고 있었다. 네이버 지도에 마트를 검색하자 나오는 곳은 '롯데마트 창원 중앙점'이었다.
쏜살같이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나오고 나니 긴장이 약간 풀렸다. 까딱까딱 위태롭게 매달려 양 옆으로 고개를 흔들고 있는 부러진 와이퍼를 보니 웃음이 터졌다. 무사히 마트에 도착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가 차량용품 코너에서 사이즈에 맞는 와이퍼를 찾아 구매했다.
크기 비교를 위해 부러진 와이퍼를 가지고 새 와이퍼를 사러 가는 길에 신이 난 남자친구 (현 남편)
놀란 마음이 진정되고 나니 허기가 져서 근처 명랑 핫도그에서 핫도그도 하나씩 사 먹고 다시 차로 돌아와 와이퍼를 교체하려고 했다.
"엥? 이게 왜 안 끼워지지?"
남자 친구는 와이퍼가 깔끔하게 부러진 게 아니라 고정 폴대에 작은 부품 조각을 남긴 채로 부러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럼 어떡해?"
"이 조각을 빼내야지 새로 산 와이퍼로 교체를 할 수 있는데.. 다시 마트로 가서 일자 드라이버도 사 오자. 그거면 빼낼 수 있을 것 같아."
일자 드라이버를 사 오고 나서도 부품 조각은 말썽을 부렸고 한참을 씨름한 후에야 우리는 와이퍼를 교체할 수 있었다. 새 와이퍼를 달고 몇 번 작동시켜 이상 여부를 확인하고 다시 안동을 향해 출발했다.
와이퍼 사건 때문에 우리는 예정보다 두어 시간 늦게 안동에 도착했고, 오래오래 둘러보고 싶었던 하회마을을 빠르게 둘러보아야 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여행의 마지막 식사로 안동 찜닭을 골랐다.
진짜 맛있게 먹었던 안동 찜닭
마지막 여행지로 가던 길에 일어난 사건. 당시에는 사고가 날까 봐 크게 놀랐었다. 지나고 나서 보면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오히려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 남자 친구였던 이가 이제 남편이 되어 내 곁에 있다.
빗물 속에서 시야를 환히 밝혀 주는 와이퍼가 부러져도 정신만 차리면 무사히 고속도로를 빠져나올 수 있다. 여행 일정이 틀어지고 늦어져도 그보다 값진 추억이 남는다. 와이퍼도 인생도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장면이 마음속에 남는다면 살아갈 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