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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Aug 07. 2023

그냥 맛있겠다고 고맙다고 할 걸



핸드폰이 고장 나서 고치기 위해 오늘 오후 반차를 쓴 남편이 생각보다 일찍 집으로 귀가했다.


나는 출근하기 직전이어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종이봉투를 줬다.


“이건 뭐야?”

“싸길래 많이 사봤어”


남편이 건넨 봉투에는 빵이 여섯 개도 넘게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냉동실에 이미 꽁꽁 대고 있는 맘모스빵, 식빵, 마들렌빵이 생각나서 멈칫했다.



‘빵이 집에 많은데... 냉동실에 자리도 넉넉지 않고.. 내일은 휴가 때 먹을 고기도 배송이 와서 얼려야 하는데 말이야...’



살림을 하는 사람이니 고마운 마음보다 현실적인 냉동실 평수가 먼저 떠오르고 말았다.


남편: “이건 자기가 좋아하는 스콘이랑 그.. 뭐지.. 그 빵이야. 스콘은 얼그레이 맛이야!”

나: “응, 냉동실에 맘모스빵 아직도 두 조각 남아있어.”


남편은 주눅이 들었다.


출근하는 차 안에서 내가 똥멍청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편은 나를 주려고 맛있는 빵을 잔뜩 산 죄 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얼그레이 맛도 기억하고, 스콘과 마들렌도 기억해서 사 왔다.


거기다 대고 고마워 하기는커녕 냉동실에 맘모스빵 두 조각 있다고?


이게 무슨 동문서답에 상대방 김 빠지게 만드는 저질 대화법인가.


내가 남편이라면 나랑 말하기 싫을 것 같다.


너무 후회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낮에 설거지하면서 유튜브에서 법륜스님 즉문즉설이라는 것을 봤는데,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그런 상에 집착하는 것이 스스로를 얽매이게 하고 힘들게 만들 뿐이라고.


냉동실 평수 사정을 생각해서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발견해도 참고 안 사 오는 남편을 바라는 건 내 욕심, 남편이 빵을 사 오고 싶은 건 남편의 자유.





비좁고 차가운 냉동실 안에는 남편이 가져온 뜨거운 마음 세 봉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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