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슬로우.

1건에 800원짜리 신용카드를 배송하는 어떤 할아버지의 하루

by 김이로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다. 이리저리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버스 앞 문 쪽으로 다시 우르르 몰려간다. 재빠르게 이동하는 젊은 사람들. 몇 발자국 걸음만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할아버지는 기다란 줄 끄트머리 두세 번째에 자리를 잡고 차례를 기다리다 느릿한 동작으로 버스 앞문 기둥 손잡이 바를 잡고 탄다.



할아버지의 뒤에 서 있던 두어 명의 사람들, 표정의 변화가 심하진 않지만 살짝 찡그려진 미간으로 할아버지의 탑승을 기다린다.



"아유 이거 버스카드가 어디 있지. 저, 잠시만 기다려 줘요."



당황하는 할아버지.







'아 이거 참. 경로우대 어르신 교통카드는 지하철만 무료여서, 버스 탈 때는 버스카드가 필요한데 어디 뒀는지 깜빡했네.'



"거, 현금으로 낼게요. 미안합니다. 나이가 드니 이렇게 깜빡깜빡하네."


카드가 아닌 현금을 주섬주섬 내자 더욱 찡그리는 뒷사람들.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대꾸 없는 독백을 마치고 얼른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아 오른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춤을 닦는다.







"어디 보자, 오늘은 몇 장 해야 하나."


할아버지는 신용카드와 체크카드 배송 일을 한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뚜벅이로 다녀야 한다. 왜냐하면 버스비는 개인 부담이니까. 그나마 오늘은 비가 오지 않아 다행이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수십 장의 카드 우편물을 가방에 메고 한쪽 손에는 우산을, 반대편 손에는 핸드폰이나 싸인용 태블릿 PC를 들고 이동해야 해서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어제, 박양춘이가 카드 잃어버렸다는 거 들었나?"


"박 씨가 그랬어? 그거 그럼 어떡하나. 20만 원 물어냈대?"


"그럼 사무실에서 물어내라는데 별 수 있나."



카드 배송은 애로사항이 많다. 카드는 본인 대면 배송이 원칙이다. 우편함이나, 경비실에 맡기는 것은 원칙상 안 된다. 지금 직장에 있다며 주소지는 경기인데 서울의 직장으로 당장 가져다 달라는 진상도 있다. 가끔은 전화를 여러 번 해도 절대 안 받고, 문자로만 '우편함에 두세요' 띡 보내는 사람이 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오늘 카드 배송이 밀리면 그만큼 내일 더 많이 배송해야 하니까 운에 맡기며 우편함에 두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실한 경우엔 오롯이 배송 기사 책임. 분실 보상금은 사무실마다 다르지만 보통 20만 원이다. 더위와 추위를 견디며 카드 한 장을 배송할 때 받는 돈은 한 건당 800원에서 1,000원이다.



할아버지는 오늘 진상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하며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사무실을 나선다.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다행히 문제없이 배송을 마친다.


"앞으로 이곳에 배송이 많겠네. 대단지 아파트라 세대수가 많으니까. 각 동 위치를 미리 좀 익혀두는 게 좋겠다. 배송이 많이 남았지만 짬을 내서 좀 둘러보고 다음 배송으로 넘어가야겠다."


삐까뻔쩍한 새 아파트 단지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는 할아버지.






"시니어 크럽, 커뮤니티 센타.. 경로당도 관리실도 요새는 다 영어로 써 놓는구나. 나는 그래도 영어를 읽을 줄 아니 겨우 알지만, 이거 배움이 짧은 사람들은 힘들겠구나."



잰걸음으로 단지를 둘러보던 할아버지는 서둘러 다음 배송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메리야스와 반바지를 입은 채 색이 노랗게 바랜 '골드스타' 선풍기를 틀고 두꺼운 티브이를 보는 할아버지. 작은 집 한 채는 있지만 따로 든 개인 연금도 보험도 가족도 딱히 없어 마음이 급해지는 할아버지.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건가 봐."



티브이에서는 노인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옆에는 늙은 말티즈 한 마리가 꼬리를 딸랑딸랑 거리며 앉아있다.






"해피야, 이 할애비가 쓰러지면 네가 왕왕 짖거라. 나는 떠나도 너는 굶으면 어쩌냐. 왕왕 짖으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홀로 남은 너를 잘 돌봐 줄 거다. 가만히 있지 말고 내가 안 움직이고 밥도 안 주거든 꼭 왕왕 짖어라."








오래간만에 친구와 점심 식사 약속에 간 할아버지. 친구는 다리를 절뚝이며 온다.



"다리는 어째 더 안 좋아진 것 같은가."



"절뚝이라도 걸어라도 다니니 얼마나 자유롭나! 어서 가세."



"그래, 나이 들어 하나씩 고장 나서 부족한 것이 있어도 세상은 맘먹기 마련이니 기죽지 말자고."



종로 청진식당에서 오징어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친구와 헤어지는 할아버지. 식당에서 나서면서 벗어 두었던 가벼운 여름 베레모를 쓴다.



'멋쟁이 모자를 써야지. 뙤약볕에 더위도 피해 주고 듬성한 머리가 아직은 조금 어색해. 머리에 쓰면 자신감이 생기는 모자야. 카드도 깔끔한 모습으로 배송하면 받는 이들도 좀 더 즐겁지 않겠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휙 하고 날아간 모자.


"어허, 내 모자가 어디로 날아가나!"



데굴데굴 굴러가던 모자를 행인들은 흘긋 보고는 아무도 주워주지 않는다.



몇 번을 모자와의 꼬리잡기 실랑이 끝에 멈춘 바람에 할아버지가 모자를 집어 든다.



"네가 있으면 내가 좀 더 기운이 나니까 내 곁을 떠나지 말고 머리에 꼭 붙어 있거라."







다시 평범한 어느 날. 다시 버스를 타게 된 할아버지. 예전엔 펄쩍 한달음에 뛰어오르던 계단인데, 버스 계단이 왜 이리 가파르기만 한지. 한 칸 한 칸 옆으로 몸을 돌려 올라가야 겨우 버스에 탈 수 있다. 주섬주섬하니까 기사가 뭐라고 한다.


"#!$!#^%^@#$*($%#"



'에고 야단 났다. 행동이 굼뜨다고 야단인가 보다.'


할아버지는 더욱 당황하여 허둥지둥한다.



"어르신~ 천~ 천~ 히! 하~ 셔~ 도~ 돼요! 앉으~시면~ 출발~할게요."



"예,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버스 창문으로 햇빛이 내리쬐고 할아버지의 가방에는 오늘도 카드가 잔뜩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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