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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Oct 03. 2021

술 취한 사람이랑 뽀뽀해도 안 취하나

디오니소스와 큐피드의 환상의 콜라보

2016년 초, 나는 대학교 선배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첫 만남에는 내가 있는 지역으로 상대가 오기로 했는데 그날 퇴근이 좀 늦어서 약속 시간에 10분 정도 늦었다. 양해를 구하고 구두를 신은 다리로 역까지 열심히 뛰었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퇴근이 예상보다 늦어져서요."

"아니에요, 별로 안 기다렸어요."


우리는 당시 유행하던 대왕문어 치킨집에 갔다. 문어 다리를 통째로 튀긴 것과 치킨, 감자튀김과 핫도그 튀김 등이 부속으로 대형 구절판 같이 생긴 접시에 모둠으로 나오는 요리였다.


"와, 양이 진짜 많네요."


"그러게요. 많네요."


첫 만남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두 번째 만난 날이 밸런타인데이 즈음이라 그에게 초콜릿을 한 상자 선물했다. (물론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중이기도 했고 나는 초콜릿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메달만한 초콜릿을 순식간에 세 개나 까먹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세 번째인지 네 번째 만남인지에서 그가 얘기했다.


"우리 사귈까요?"


"어.. 저 좀 더 생각해볼게요."




그렇게 거절도 승낙도 아닌 애매한 말을 내뱉고 며칠 뒤, 나는 대학교 졸업식(나의 졸업식이 아닌, 휴학을 해서 졸업이 늦어진 내 동기들의 졸업식)에서 취해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인사불성 대 만취를.




"왜 데리러 안 와요?"

"네???"

"왜 데리러 안 오냐고요. 이렇게 취했는데."





90% 이상의 필름이 나가버린 내 기억으로는, 잔뜩 취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촌역 즈음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난데없이 왜 데리러 안 오냐고 했다. 그리고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나진 않는데 우리 집 근처 구름다리 아래쪽인가 즈음에 차를 세워 놓고 별 웃긴 꼴을 다 보이면서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아침, 울렁이는 속을 뒤로하고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지난 통화목록과 카톡을 본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조심히 가여 근데 진짜 술취한 사람이랑 뽀뽀해두 안취하나 ?!"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퍼마시고 이성을 잃은 나는 무의식의 자아에 지배당했고, 그 무의식의 나는 그에게 뽀뽀를 퍼부었나 보다. 미쳤군. 하하.


그래도 무의식의 나는 보는 눈이 꽤나 좋았던지, 술에 쩔어서 왜 데리러 안 오냐고 오만 진상을 부린 나를 그가 받아줄 줄 알았나 보다. 아닌 밤중에 내가 휘두른 술냄새 나는 홍두깨는 맘씨 넓은 그가 예쁘게 다듬어 큐피드 화살로 만들어 주었고,




우린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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