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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04. 2023

안마의 if 가정법

남편이 침대에서 몹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휴. 나 지금 피곤한데 조금 있다가 하면 안 될까?"


(야한 얘기 아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일 것이다. 하! 하! 하!)






나는 학원강사다. 출근이 늦기 때문에 아침에 늦잠을 자고, 출근길 지옥철을 타지 않고, 낮 시간에 비염 스프레이 약을 타러 사람이 몰리지 않을 시간에 이비인후과에 가고, 냉동 택배와 함께 온 아이스팩 열 개를 모아서 휴지 한 롤과 교환하러 한가로이 주민센터에도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9 to 6로 근무하는 '일반 사무직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퇴근 후 술집에서 쏘맥 한 잔 하며 하루의 회포를 풀 수 없고ㅡ퇴근을 하면 10시 30분이다. 나보다 일찍 퇴근하는 술집 사장님들도 많다.ㅡ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기가 무척 힘들며, 천둥벌거숭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의 "왜요~~~ 하기 싫어요~~~"를 매 순간 쳐냄과 동시에 중2병 중환자들에게 제발 알아 들었는지 모르겠는지 손가락 하나만 까딱 해달라고 하루 종일 빌어야 한다는 뜻이다.




막차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배차 간격이 넓어져 한참을 기다린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면 오후 11시 남짓. 저녁 식사는 '당연히' 거르고 와서 허겁지겁 '빨리 되는 음식' 아무거나를 냉장고에서 골라서 입에 욱여넣는다. 그다음은 가방 정리, 식탁 정리, 먹은 것 정리, ㅡ 컨디션이 그나마 괜찮은 날엔 설거지까지 하고 HP가 0에 가까운, 흔히 게임에서 말하는 빨피일 때는 겨우겨우 싱크대에 그릇을 넣어놓는 것까지만 한다 ㅡ 담당 학생들 관련해서 해야 하는 잡무들 정리... 할 일들을 가능한 빠르게 하고 안방에 들어가도 12시가 넘어 이제 다음 날이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제야 침대에 들어와서 겨우 한 숨을 돌리려던 참인데, 남편이 침대에서 몹시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휴. 나 지금 피곤한데 조금 있다가 하면 안 될까?" 남편은 알겠다고 하며 납작 엎드려 휴대폰을 하면서 꾹꾹이 안마 시간을 기다린다.



꾹꾹이 안마 받으실 분?



 몇 개월 동안 성공적인 다이어트와 운동 트레이닝을 해내고 있는 중인 남편. 매일 밤이면 다음 날 점심에 먹을 구운 계란 도시락을 준비하고, 회사에 가서는 도시락 점심식사를 1분 만에 해결하고 사내 헬스장을 이용하여 운동을 한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운동을 하다 보니 등 운동을 하면 등이 결리고 허벅지 운동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린단다. 특히 다리는 혼자서 주무를 수 있지만 등은 스스로 주무르거나 근육을 푸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등 안마를 가장 좋아한다.



나도 물론 안마를 10분이고 20분이고 남편이 원하는 시간에 해 주고 싶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빨피에 캐릭터가 죽네사네 하는 체력이다. 이제야 겨우 침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곧바로 안마를 기대하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입에선 볼멘소리가 나온다. 게임 캐릭터들도 렙업을 하기 위해 노가다로 달팽이 사냥을 하고, 버섯을 공격하고, 슬라임을 패면서 힘이 달리면 안전지대 사다리에 매달려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HP가 차오를 때까지. 피곤하고 뾰로통한 목소리로 남편에게 좀 기다리라는 말을 전하고 벽에 기대 침대에 앉아 있으면 이내 이런 생각이 든다.



'아, 만약 반대 상황이라면 남편은 바로 나한테 안마해줬을 텐데.'



남편은 웬만해서는 내가 하자고 하는 것은 그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곧바로 함께 해준다. 본인이 피곤할 때나, 힘들 때나, 내키지 않을 때나, 심지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인 경우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헌신적인 남편의 모습에 감동하고 또 고마운 순간들이 금빛 실로 수놓은 빼곡한 십자수처럼 내 일상에 가득히 점철되어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으면 빨피일지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없다.



"지금 안마해 줄게. 어디 해 줄까?"




안마의 if 가정법.

머릿속으로 되뇌는 안마의 가정법.

나를 위해서도, 남편을 위해서도,

이제 체력을 기르는 운동은 내가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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