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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07. 2023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본 뒤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

할아버지가 가장 잘하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 빨래를 할 때 우리 집 거실 세라믹 식탁 위에는 항상 갤럭시탭이 모로 누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 눈으로 집중해서 보지는 못하지만 라디오를 듣듯이 귀로만 드라마나 예능을 즐기면서 집안일을 하다 보면 덜 적적하다. 보통은 <무엇이든 물어보살>, <연애의 참견>을 봤었는데 최근 편까지 모두 다 시청을 완료해서 무엇을 볼까 스크롤을 잔뜩 올렸다.



문득 몇 년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기자 김혜자 선생님이 대상을 받고 말한 수상소감이 이슈가 되었던 <눈이 부시게> 작품이 넷플릭스에 있었다! 캐스팅을 보니 김혜자, 한지민, 남주혁, 손호준이 주연으로 나온다. 한지민은 내가 아주 어릴 적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에서 사랑스럽고 멋진 캐릭터로 나와서 바로 보기로 결정했다.



<눈이 부시게>의 줄거리는 스물다섯 혜자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사용하다가 부작용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보다 빠르게 늙어 하루아침에 할머니 혜자가 되어버리는 내용이다. 극의 중간중간에 할머니 혜자와 관계를 맺는 다양한 노인들이 나온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극 중 어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모여든 노인들에게 혜자가 묻는다. "각자 자기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행동이 굼뜨고 점심 식사 후에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소파에 앉아 낮잠에 빠지는 노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리가 잘하는 것이 뭐가 있겠냐며 망설인다. 하지만 혜자는 노인들이 잘하는 것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다. 걸음이 느리다는 단점이 이 사건에서는 악당(?)을 상대하는 큰 장점이 되고,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 노인은 역설적으로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렇게 노인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1월 4일 수요일 밤에 잠들어 꾼 꿈에 우리 할아버지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2019년 8월에 돌아가셨다. 가 할아버지에 대해서 아는 정보는 아래와 같다. 젊은 시절 서울 부잣집 딸인 할머니와 결혼했다는 것. 원래 하던 일을 퇴직하신 후ㅡ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ㅡ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테이프 공장에서 경비를 하셨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할아버지댁에 방문할 때마다 공장에서 얻어온 파품 테이프를 잔뜩 주셔서 마음껏 쓸 수 있었다는 것. 외출하실 때는 언제나 멋진 '헌팅캡'을 쓰셨다는 것. 그리고 명절 때 아빠와 큰아빠, 작은 아빠가 신나게 술자리를 하면 어느새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당신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티브이를 보며 잠드셨다는 것.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도 적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할아버지의 형제가 몇 분 이셨는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 시절엔 병에 걸려 형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도 많았다는데 혹시 그런 아픔이 있지는 않으셨는지. 학교 다닐 때 어떤 과목을 가장 좋아했는지. 사회에 나와서는 어떤 일을 하셨었는지. 회사에 다니며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견디며 사셨는지. 아들 좋아해서 셋이나 아들을 두고선 손주는 한 명뿐이고 손녀만 셋이어서 내심 아쉬우셨는지. 할아버지가 가장 잘하는 건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일 년에 명절 한 두 번만 만나는 할아버지가 어려워서였는지, 지금보다 더 어렸던 나에게는 반짝이고 멋진 것들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아서 느리고 무채색으로 시들어가는 할아버지는 뒷전이었는지. 이 늦었지만 론해보자면 패션 센스가 좋으셨다. 할머니 역시도 그랬는데, 두 분은 아마 그 당시 최고의 멋쟁이들끼리 만나 결혼한 것 같다. 할아버지가 가장 잘하는 것은 멋진 옷이나 모자, 안경 등을 고르는 일이 아닐까 싶은데, 만약 우리 할아버지가 <눈이 부시게>의 캐릭터 중 한 분이었다면 동료 노인들에게 어울릴만한 멋진 패션 코디를 제안해주고 다 같이 진 장수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리드하지 않으을까.




돌아가신 뒤로 처음으로 꿈에 나온 날,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는 내가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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