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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로 Jan 06. 2023

졸업식에 조화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3년 동안 썩지 않았던 노란 장미 꽃다발

2009년 2월 6일, 졸업식날 사진들을 훑어보면 자동 웃음이 납니다. 올 해로 서른네 살이 된 저는 사회에서 아직도 '청년'에 속하는데요. 백세 시대에서 이렇게 아직도 어린 사람 취급을 받는 저에게도 고등학교 졸업식은 벌써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니 참 시간은 빠르기만 합니다. 사진을 보면 아직도 꾸준히 연락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있고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일부는 인스타그램에서 서로 팔로우를 하며 사는 소식을 들으며 산다고 하는데 저는 인스타그램 팔로우도 몇 명 하지 않아서 사실상 남이 되어버린 친구들이지요. 모쪼록 오늘 글을 쓰면서 안부를 알 수 없는 친구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새해 인사를 건네봅니다.



요즘에는 보통 1월에 졸업식을 많이 하더라고요? 제가 학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도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졸업을 합니다. 10여 년 전에는 2월에 졸업을 했거든요. 2월 밸런타인데이 때 여자애들이 남자애들에게 초콜릿을 주는데 3월 화이트데이 때는 졸업하고 이미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져서 사탕 수금(?)을 못 해 우리가 손해라고 여학생들끼리 이야기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2006년 2월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2009년 2월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3년 간격의 제 졸업 사진에 등장하는 꽃다발은 똑같은 꽃다발입니다. 꽃 종류만 같은 장미 꽃다발이라는 뜻이 아니라, 꽃 종류와 색깔, 송이 수, 포장다발까지 완벽히 똑같은,



생화가 아닌 조화 꽃다발입니다.




살면서 조화를 봤던 적은 여러 번입니다.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가 계신 추모공원에 가면 수많은 봉분 앞에 원색의 조화 꽃다발들이 제각각 꽂혀 있었습니다. 대학로 연극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고백할 때 썼던 소품 꽃다발, 결혼식 전 스튜디오 촬영날 이모님이 이것저것 번갈아가며 쥐여주셨던 여러 예비신부의 손을 거쳤을 조화들도 마주했었지요. 하지만 졸업식날에는 조화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제 손에 그 꽃다발을 들기 전까지는요!




제가 중학교 때 들고 찍었던 그 조화 꽃다발은 우리 집 냉장고 꼭대기에서 누런색 이마트 봉지ㅡ지금은 대형마트에서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제외한 비닐봉지를 볼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각 마트마다 로고가 크게 박혀있는 비닐봉지가 있었습니다ㅡ에서 3년을 곤히 잠자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다시 등장했습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쉽게 예측이 가능합니다. 학창 시절에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거든요.



 바로 그 꽃다발입니다!



요즘 꽃다발은 얼마쯤 하나요? 3만 원 정도면 아주 저렴하게 잘 샀다 하고 특이하고 예쁜 수입 꽃이 조금만 추가되면 5만 원을 훌쩍 넘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원래 꽃을 자주 사지 않아서 이 시세도 얼마 전 공연 축하 꽃다발을 살 기회가 있어 알게 되었어요. 10년에서 15년 전, 어렴풋한 기억 속 졸업 시즌이 되면 어떻게들 아셨는지 꽃집에서 졸업식을 하는 학교 앞에 전날부터 테이프로 자리를 맡아 놓고 꽃다발을 파셨어요. 작고 단순한 건 1만 원에서 1만 5천 원, 화려한 것들은 2만 원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언니랑 3살 차이 나거든요. 그럼 계산을 해 볼게요. 언니 고등학교 졸업하는 해에 저는 중학교 졸업. 그러고 3년 뒤에는 또 제가 고등학교 졸업. 못해도 3번은 꼬박 꽃다발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그 시절 우리 엄마는 허리띠 졸라매고 꽃다발은커녕 꽃송이 줄기로 나물 무쳐 먹을 여유도 부족했어요. 그렇다고 안 사자니 남의 딸들은 두 개씩도 받는 꽃다발을 내 딸만 헛헛한 손으로 사진 찍는 걸 볼 순 없잖아요? 이번엔 눈 딱 감고 산다 해도 3년 뒤에는 살림살이가 좀 더 나아졌을지 알 길이 없잖아요?



엄마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3년, 아니 30년이 지나도 시들지 않는 꽃을 사는 거야. 그때는 다이소가 없던 시절이라 동네마다 '생활용품 D.C 마트'가 하나씩 있었어요. 거길 가서 노란색 장미꽃 조화 한 다발이랑 꽃 포장지를 사서 옵니다. 엄마가 손재주가 기가 막혀요. 포장지에 꽃을 싸고, 어디선가 화장품 선물을 받았을 때 겉상자에 예쁘게 매여 있었던 끈 리본을 보관해 두었던 것을 꺼내 손잡이 부분을 만들었습니다. 자, 눈을 맞고 태풍에 맞서도 시들지 않는 꽃다발 완성!




당시 친구들의 꽃다발. 모두 생화입니다.




그렇게 그 꽃다발은 2006년에 두 번(언니랑 내 졸업식), 2009년에 한 번(내 고등학교 졸업식), 총 세 번을 요긴하게 쓰입니다. 사실 엄마가 조화 꽃다발을 들고 졸업식에 온다는 것을 알았을 때 걱정이 올라왔습니다. '친구들이 왜 너는 꽃다발이 '가짜'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을 하지?' '나도 이런 날 만큼은 조화 말고 생화 꽃다발을 받고 싶은데...' 하지만 중학생씩이나 된 저는 엄마에게 그 말을 할 만큼 어리지 않았지요.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꽃다발을 들고 친구들과 사진을 찍게 됩니다. 다행히 친구들 모두는 졸업식 특유의 들뜨고 시원섭섭한 찬 공기에 저마다 취해 남의 꽃다발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습니다. 3년 뒤 고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저도 이제 경력 자니까 긴장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졸업식에 임했던 기억입니다.




졸업식 사진 속의 저는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많이 자라고 달라진 모습인데 꽃다발은 시들지도 않고 마치 어제처럼 똑같은 모습입니다. 꽃다발이 변함없는 모습이었던 건 조화여서가 아니라, 몇 년이 지난 들 딸을 사랑하는 변치 않는 엄마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Image by senivpetro on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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