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는 문이 어디인가요?
우리 집 식탁에는 의자가 여섯 개 있다. 원래는 4인용 식탁인데 양 끝에 의자를 하나씩 더 놓게 되면서 6인용으로 변했다. 셋째인 막내 늦둥이가 수저질을 하면서부터 한 자리를 차지하고, 친정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다니게 된 대학병원이 우리 집에서 더 가까워서 같이 지내게 되어 한 자리가 더 늘어났다.
어느 날 저녁을 먹는데 식탁의 6인 중 2인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법에서 정한 장애인 주차구역 확보 비율이 전체 주차대수의 2-4%인데, 우리 집은 식탁의 33.333…%나 장애인의 자리다. 구성원 대비 높은 장애인 비율은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생긴 친정 아버지의 뇌 병변 장애, 둘째의 발달 장애가 그 까닭이다. 한 명은 나를 낳아준 부모이고, 한 명은 내가 낳은 아들이다. 나는 이 둘의 장애를 알게 되기 전까지 어려 서부터 학교 교육을 받는 내내 그리고 결혼과 육아를 시작하기까지 한 번도 장애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어디선가 스치기는 했겠으나 장애인과 대화를 나눈다 거나 인사를 하고 서로를 소개하는 그런 만남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유일하게 장애인이 등장하는 나의 유년의 기억은 휴대용 카세트에서 찬송가가 들려오며 지체 장애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남대문 시장 길바닥에 하체를 늘어뜨리고 팔꿈치로 시장길을 기어가는 장면이다. 그분은 기어 다니며 사람들에게 바구니를 내밀어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 그분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던 찬송가의 가사가 또렷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저희 아이에게 발달 장애가 있습니다’ 라고 내 입으로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거쳐온 여정이 있다. 그중 하나가 그때의 남대문 시장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기억은 편집되어 거기서의 나는 더이상 물건을 보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시장 길바닥을 기어다니는 그분의 뒤를 따라다닌다. 그분을 찬찬히 떠올리고 들여다본다. 꽤나 두꺼운 고무 재질의 자루가 하체를 감싸고 있다. 장애가 있는 하체를 감추기 위함 인가 봤더니, 그보다 하체가 상체의 움직임에 끌려다니다 보니 땅바닥과 생기는 마찰에 피부 손상을 막기 위한 나름의 보호 장치이다. 그분의 시선도 느껴본다. 눈앞의 세상이 사람들의 다리들로 가득하다. 바구니 안에 동전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지금 여기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어디까지 가시려나, 뒤따르는 나의 시장 돌기도 출구를 못 찾고 뱅글뱅글 반복됩니다. 다시 오늘, 나의 옆에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본다. 내 마음에서도 찬송가의 앞부분이 흘러나온다. 나 같은 죄인 때문이라고, 나의 죄이며, 엄마인 내 잘못이라고.
아이의 장애를 처음 인지했을 때, 매일같이 뒤엉킨 감정들로 겉으로는 멀쩡하게 회사도 다니고, 밥 잘 먹고 잘 사는 듯 보여도 온전히 서 있기도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죄책감, 두려움, 원망, 조바심, 이기심... 내 안에서 하도 요란하게 떠들어대서 남이 하는 말이 잘 안 들리고, 내가 내는 목소리만 더 커지던 시간들이었다. 전부 다 그 ‘장애’ 때문이라고 아이에게 있는 ‘장애’ 가 없어져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태도로 아이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했고, 장애를 집중 치료와 학습을 통해 비장애로 만들려는 노력이 엄마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우리 가정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것이 내 아이의 ‘장애’ 그 자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를 누르는 것은 내가 받아온 교육과 성장한 환경을 통해 갖게 된 장애에 관한 편견임을 목격하게 되었다. 일상에서 장애인을 마주칠 일이 없으니 내 안에 장애인을 거부하는 마음, 나와 다른 어떤 인간을 향한 불편함이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녀가 그리고 나이 드신 부모의 장애를 곁에서 지켜보는 과정에서 도드라져 올라오는 나의 또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나와 다른 모습의 타인에 대한 차별이 내 안에도 서슬 퍼렇게 존재했다. 장애에 관한 나의 편견과 거부감을 인정하고,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받아들이며 어느새 어질러진 내면이 정리되고, 기억 속 남대문 시장 돌기는 출구를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