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지만 순수했던.. 그리고 또 한심한 나의 짝사랑.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아직도 기억이 날 만큼 선명하다.
시간이 갑작스럽게 멈추면서, 그 사람의 표정과 말 한마디가 뇌리에 박히는 순간이랄까.
그 순간은 예고편도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내 마음에 침투한다.
남들이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찰나의 순간이건만, 나에겐 영원 같은 순간.
나는 감히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 당시의 나는 참 별난 인간이었다.
남들 다 놀 때, 혼자 독기를 품고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면서 공부를 하던 인간이었으니.
시험이 끝나고 다들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거나 놀 때에도, 나는 책을 보면서 공부하고 근로시간이 끝나고도 공부하러 가던 시절. 누군가가 보기엔 참 신기하면서도 왜 저럴까 싶었을 것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공부하러 가던 시간이었다.
근로 장학이 딱 6시에 끝나고, 컴퓨터실 문을 다 잠근 뒤 열쇠를 반납하러 대학 본부로 가던 길.
나는 몇몇 여학생과 조교님과 함께 퇴근하며 걷는 중이었다.
가을이 시작되어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낙엽이 바스락 거리던 그 거리를 걸으며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청춘의 아름다운 한 장면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풍경.
사람들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내 얘기가 우연히 나왔다.
중간고사도 끝나고 다들 놀러 가는 그 시절에, 여전히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하는 내가 갑자기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시험기간에도 공부를 안 하는 학생들이 태반인 대학교에서, 시험 끝나고도 공부하는 나는 별종이 맞았으니까.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1년 정도 편입 재수를 하면서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기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넘치면 항상 쓸데없이 써버리는 인간이다 보니, 나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더라도 9 to 10 까지는 항상 도서관에 몸을 놔두는 습관을 잡으려 했다.
집에 가면 또 모바일 게임을 하거나, 컴퓨터 게임에 손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렇다 보니, 다른 근로장학생들은 열쇠를 반납하고 그대로 내리막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항상 다시 올라가서 도서관을 향했다.
다른 학생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 본부에 열쇠를 반납하고, 나는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가겠다고 하자 그녀가 갑작스레 꺼낸 감탄사 같은 말.
"우와, 정말 신기하다!"
정말 신기한 사람을 보듯이, 어떤 악의도 없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날 쳐다보며 한 그녀의 말은 그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정말 외롭고 지친 상태였는지 그 악의 없는 순수한 감탄사에 내 마음은 속절없이 함락되었다.
세상이 순간 멈추어 버리면서, 흩날리던 낙엽내음은 더 짙어지고 가을의 향기가 풍미롭게 느껴졌다.
분명, 숨도 멈춰버렸을 그 찰나에 공기는 달콤함을 한 아름 싸들고 내 전신을 강타했다.
영원 같았던 그 순간이 끝나고 나니, 별안간 격렬한 심장박동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전신의 핏기가 순환하는 걸 느끼면서 현실을 다시 인지했고, 겉으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간신히 사람들을 배웅하고 나서,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익숙했던 세상, 항상 고독하게 걸어 올라갔던 그 언덕이 그녀로 인해 새로워졌다.
도서관만 존재하는 척박했던 내 세상은 그녀의 존재 하나만으로 금세 가득 차버렸다.
가을만큼이나 쓸쓸했던 나의 세상은 한순간 봄이 되어버렸고, 나의 검은 먹물 같은 마음은 청명한 하늘을 만나 투명해졌다. 세상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안 가서,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의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뒤로, 내 마음은 오갈 데 없는 나그네처럼 갈팡질팡했다.
나의 이성은 당연히,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올바른 의견을 꺼내었고 내 머리는 이성의 명령에 따랐다.
내 머리는 그렇게 점점 차가워졌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점점 더 뜨거워져갔다.
이 혼란 속에서, 어렸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와 같이 근무하게 될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녀를 막상 보면 또 마음이 아릴 만큼 뜨거워졌지만 내 머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몸과 마음과 정신이 각각 따로 노는 이 혼란 속에서도 나는 선을 넘지 않도록 굉장히 조심했다.
과도할 정도로 조심했지만, 마음이 넘쳐흘러 조심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아마, 나의 마음은 은연중에 조금 드러났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주변동료들은 내 마음을 알아챘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선을 넘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냥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쓸쓸한 가을의 계절에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은 짝사랑이 돼버렸고 그 짝사랑은 나에게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선사했다.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는 겨울이 왔지만, 내 마음은 식을 줄을 몰랐다.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생각이 나서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데도.. 내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 마음을 어떻게든 끊어내야 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라면, 내 편입을 방해해서는 안 됐다.
나의 편입은 꼭 이루어져야 하는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마음을 끊어내는 방법을 몰랐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끊어낼 수 있단 말인가?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멈출 줄 모르던 내 마음.
이런 나의 모습이 운명이 보기에는 괘씸했던 걸까?
내 운명은 나에게 다소 극약처방을 해주었다.
기말고사 기간에, 알콩달콩 공부하는 그녀와 그녀의 남자친구 모습을 보게 해 준 것이다.
그동안은 한 번도 실물을 보지 못했었으니, 나는 현실을 깨닫지 못했었다.
내 마음은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존재를 아예 지워내 버렸었는데, 그건 역시 내 마음에서 뿐이었다.
현실에서 그녀의 남자친구는 멋진 모습으로 옆자리에 앉아있었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받는 존재였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드디어 내 마음은 현실을 깨닫고 서서히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찌질하고 바보 같았는지를 한눈에 깨닫게 되었다.
짝사랑은 시작은 찬란했지만, 끝은 무참하게 끝난다.
나는 비참해진 심정으로 형과 같이 사는 투룸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내 운명은 그날의 나에게 펑펑 울도록 허락해 준 것이었을까?
항상 집에 있던 형은 때마침 집에 없었다.
연락을 해보니,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면서 마음껏 쉬라고 했다.
나는 마음껏 그날의 투룸을 눈물로 적셨다.
펑펑 운 다음날부터, 내 마음은 겨우 차가워질 수 있었다.
차가워진 내 마음은 다시금 공부할 수 있는 상태로 무장이 되었고, 나는 그렇게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참해진 내 마음은 공부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고, 드디어 토익을 915점 받으며 토익을 졸업하게 되었다.
물론, 내 마음도 그녀에게 졸업을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퇴나 다름없었지만.
그러나, 자퇴한 내 마음은 또다시 속수무책으로 다른 여자에게 입학해 버렸다.
2019년의 봄, 편입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내 마음은 다시 다른 여자에게로 향했다.
변명을 하자면, 나의 2018년 겨울은 너무나 매섭고 추웠기에, 나는 약간의 봄에도 눈물이 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더 자세한 변명을 위해, 2018년의 겨울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