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봄날은 사치였을 뿐이었다.
2018년의 3월.
복학생들은 설레어할 법한 캠퍼스 생활이 시작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소중한 시간과 돈을 함부로 보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복학 전까지의 2개월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나는, 3월 한 달 동안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의 시간에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하고 남는 공강 시간에는 또 도서관을 가는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1학년때와 별 다를게 없어진 2학년.
나란 사람은 군대를 갔다 오고도 달라진 게 없었다.
군대에서 나름 고생은 했지만 그냥 고생만 했을 뿐 발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을 더 해봤어야 했는데, 나는 그저 견뎌내기만 한 사람이었기에 2학년 대학생활도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게 당연지사.
나는 남들이 놀러 다니는 3월에도 내내 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생활비는 다행히, 근로장학을 할 수 있었기에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 근로장학의 기회를 또 놓칠 수 없기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따로 토익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올 A+을 받아야 겨우 근로장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시험기간에는 토익 공부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내 동기들은 군대에 갔다 와도 여전했어서 성적을 잘 받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학과 공부는 잘 되는데 토익 공부가 되지 않았다.
공부 습관이 아직도 잡히지 않았던 건지, 아직 실력이 낮아서 그런 건지 지문을 읽고 문제를 풀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토익 공부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려서 기말고사도 끝이 나버렸다.
1학기 학점은 올 A+이 나와서 다음 학기도 근로장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편입을 위한 학점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 학기에 올 C+을 받더라도 가능했다.
문제는 토익이었다.
학기 중에 토익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모의고사도 풀지 않았던 나의 수준은 처참했다.
7월에 정식으로 시험도 치지 않았던 나는 9월 전까지 900을 만들어야만 했는데,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겨울과 달리 이번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할 마음과 의지가 생겼기에 무작정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문제집을 사서 독학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7월 말에 시험 친 점수는 700점 후반.
나쁘진 않았지만, 9월까지 900을 찍으려던 나에게는 부족한 점수였다.
8월은 정말 죽자 살자 공부해야 했다.
남은 여름방학기간 동안은 근로장학을 마치고서도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내내 공부를 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였다고 생각한 후 8월 말에 시험 친 토익 점수는 예상과 달리 800 후반에서 멈추고 말았다. 내 희망도 여기서 바로 멈춰버렸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 내 머리가 부족한 건가?
내가 모바일게임만 안 했어도.. 이번 여름방학 때는 900점을 무조건 넘겼을 텐데..
후회와 자책감이 여름날의 무더위보다 더 뜨겁게 나를 쬐어왔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마음으로 2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9월은 시험기간이 아니니깐 한 달만 더 열심히 하면 모른다.
9월 말까지 토익 공부를 해서 점수를 만들고, 10월부터 3달 동안 벼락치기를 하면 1월까지 어떻게든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시험을 한 번 쳤다.
9월 말의 마지막 기회.
나는 여기서 또 800 후반에 멈추고 말았다.
마의 900점 장벽이라고 불리는 이 장벽은 그 당시의 나에게 높고 단단했다.
10월에는 중간고사를 준비해야 했고, 11월이 되면 전공만 벼락치기해도 부족한데 토익까지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최소한 토익 900점 이상은 넘겨야 했기에, 사실상 여기서 승부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올해에 가고 싶은 대학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조차 갖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1년은 더 준비하고 싶었다.
재수는 안 했으니 지금 여기서 편입 재수를 한다고 해서 그렇게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생활비는 그래도 내가 다 해결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나를 항상 믿어주셨으니.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진정으로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름방학 때는 그래도 나름 열심히 공부했기에, 이번 겨울방학 때 열심히 공부하면 토익은 바로 점수를 획득하고 전공공부를 하면 무조건 가능할 것 같았다.
전공공부야 학교에서 하던 공부에다가 내가 편입하고 싶은 대학의 전공교재를 구해서 공부하면 끝인 것이다.
공부 습관이 어느 정도 잡힌 나는 진짜 자신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허락해 주셨다.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보라는 말씀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중간고사를 쳤다.
그래서였을까? 중간고사 점수는 압도적으로 잘 나왔고, 나는 다시 자신감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이번 겨울방학에는 무조건 토익을 900점 이상 찍고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전공에 모든 힘을 쏟으리라.
남은 학기 동안은 쌓아놓은 토익 실력이 녹슬지 않게 틈틈이 공부하고, 겨울에 아주 끝장을 내버려야지.
아직은 약간 쌀쌀하기만 했던 가을이었지만, 내 마음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겨울은 정말 혹독하게 보내리라 다짐한 내 눈은 독기가 스멀스멀 채워졌다.
그러나, 삶은 이럴 때일수록 얄궂은 운명의 장난을 친다고 하던가?
중간고사가 끝난 쌀쌀한 가을의 어느 날.
건조하고 낙엽이 바스락 거리는 계절은 산불이 유독 잘 난다고 하던데, 내 마음에도 불이 붙어버렸다.
여느 때와 같이 근로장학을 마치고 다른 장학생과 걸어가던 어느 날.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찾아온 두 번째 사랑이었다. 이 사랑은 짝사랑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이 짝사랑 때문에, 쓸쓸하면서도 외롭지 않은 아이러니한 겨울방학을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