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헛사랑만 하던 나.
지긋지긋하던 토익을 끝내고, 마음의 여유가 찾아와서 그런 것일까?
편입을 앞두고 있음에도 내 마음은 작년보다 훨씬 산뜻했다.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공부'를 통해 일정 이상의 점수를 얻어서 그런지, 자신감도 가득했다.
20살의 봄은 그저 우울하고 어둡기만 했는데, 24살의 봄은 벌써 합격한 것처럼 마음이 약간 들떴다.
그렇게 들뜬 마음에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
이 사랑 또한 짝사랑이었다.
새 학기가 밝으면서, 새로운 근로장학생들이 또 들어왔다.
작년 가을에 짝사랑했던 그녀도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는지, 이번 학기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은 그녀의 학과 동기에게로 옮겨져 갔다.
짝사랑했던 그녀와는 이미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기랑도 친해질 수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이번에 찾아온 짝사랑은 시간이 멈추듯이 갑작스럽게 빠진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브레이크를 걸 틈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과속을 하여 과태료를 내는 것처럼, 내 마음은 어느새 신호를 어기고 동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토익 하나 졸업했다고 생겨난 마음의 빈 공간에 동기가 딱 들어오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뭔 상관이겠냐만은, 그녀도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점이 바로 문제다.
저번의 짝사랑처럼 큰 충격을 받고 절망하지는 않았지만, 또다시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서서히 마음을 또 접어야 할 수밖에..
그런데, 그 마음을 접는 방법을 내가 잘 몰랐다.
저번처럼 충격요법을 사용하면 되나? 그 충격은 너무 아파서 다시 겪고 싶지 않은데.. 서서히 접는 방법은 없을까? 친구처럼 점점 거리를 유지하면 되는 걸까?
우선은, 평소대로 계속 친하게 지내니깐 마음이 접어지지 않는 거 같아서 거리를 두기로 했다.
갑자기 쌩판 남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미숙했던 나는 거리를 두는 방법도 잘 몰랐고, 다시 친하게 지내기도 하면서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그렇게, 그녀와 계속 이상한 간격이 형성되었고 내 마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작했다.
빨리 고꾸라져서 정신 차려야 하는데, 쉽게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는 안된다. 확실한 건 마음을 빨리 접어야 도리에 맞을 것이다.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남자친구를 보는 방법 밖에 없는 것 같다.
그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는 게 아프더라도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억지로라도 볼 수 있는 걸까?
무리하다가는 크나큰 실례를 끼칠 것 같은데..
"너 남자친구랑 밥이나 먹으러 가자."
이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캠퍼스 내에서 마주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는데, 과도 다르고 시간표도 달라서 그런지 마주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영부영 마음을 조금씩 접어가다가, 우연히 문구점에서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전화받더니, 그녀를 데리러 온다는 것이다.
나는 약간의 마음 준비를 하고 그 남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문구점에서 보게 된 남자친구는.. 솔직히 말하면 외모적으론 그렇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이전의 짝사랑은 남자친구를 보고 나서 쉽게 접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달랐다.
그때의 미성숙했던 나는.. 내가 더 뛰어난 외모를 가졌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해버렸다.
나는 줄타기를 하다가 그대로 고꾸라지려 했으나, 다시 균형을 잡기 시작했다.
균형을 잡다 못해 오히려 점점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나의 도덕심이 결국 나를 멈춰 세웠고 문득 보이는 그녀의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보고 내가 정말 몹쓸 놈이구나 자각했다. 특히, 그 남자친구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스스로 많은 자책을 했다.
내가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줄타기를 멈추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녀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연락도 그만두었다.
공부하던 장소도 바꾸어서 거의 마주칠 일이 없게 했다.
그녀가 물어보면 편입으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리를 뒀다.
이 이상한 줄타기는 거의 9개월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2개월은 친해지는 기간이었고, 5개월을 좋아했고 2개월은 마음을 접었던 기간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미성숙한 두 번째 짝사랑을 끝냈다.
3월의 봄부터, 12월의 겨울까지 다른 사람을 또 짝사랑했다 했지만 편입에 큰 지장이 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짝사랑은 짝사랑이고 편입 공부는 편입공부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졸업 1년을 늦을 각오로 편입할 마음을 먹었는데, 짝사랑 때문에 편입에 실패했다면 너무 부끄러워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부관련한 이야기는 사실 크게 할 말이 없다.
대체적으로 순탄했고 원래 공부 이야기만큼 재미없는 게 없으니까.
근로장학을 위해서는 학점을 올 A+를 받아야 했는데, 그게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기본기들은 쌓여있었다.
그동안 공부했던 전공서적들을 정리하고, 몇몇 과목만 추가적으로 공부하여 암기하면 됐었다.
일반화학과 전공 관련 기사 문제집들 몇 개를 사서 정리하고 암기하면 끝인 공부.
봄부터 착실하게 암기할 내용들을 노트에 정리하며 쌓아가기 시작했다.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짝사랑을 시작했는데, 암기노트도 그즈음에 1차로 이미 완성은 되어 있었다.
편입 3개월 전에 완성되었어도 충분했을 텐데, 이미 6개월에 거의 완성이 되어버린 나는 또 한가로워졌다.
한가로워진 만큼,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작년에 정말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2~3개월만 미친 듯이 열심히 공부했다면 이 1년을 아낄 수 있지 않았을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아쉬웠다.
좀만 더 잘 알아보고, 계획을 세웠으면.. 아니 하다못해 토익만 정말 집중해서 빠르게 끝내고 전공공부를 시작했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는데.
마음이 또 약간씩 뜨기 시작했지만, 작년의 편입 TO를 봤을 때 인원이 적었으므로 경쟁이 치열했을 것이다.
전공공부가 부족했던 나는 서류가 붙었어도 전공시험에서 불합격했을 것이다.
나는 작년에 이미 한 번 떨어진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나는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의 새 학기가 찾아왔다.
전공 공부도 어느 정도 끝마치고, 짝사랑도 서서히 마음을 접으려던 그 시기에 또 다른 사랑이 찾아왔다.
내가 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고,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했다.
하지만, 9월의 나는 편입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짝사랑도 마음을 접고는 있었지만 아직 미련은 조금 남아있기도 했고.
나는 결국, 날 좋아하던 사람을 놓치고 말았다.
2019년에 내가 놓치지 않은 것은 결국 편입합격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