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찾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 절망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by Nos

INTRO


일상을 살아가다 문득, 삶을 살아가는 의미와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살아가는 것인지, 이 지긋지긋하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의문이 깊어지면 회의가 깊어지면서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가끔씩 이런데, 만약 죽음이 곳곳에 넘쳐나는 곳이라면 어떡할까요? 손만 뻗으면 닿을 법한, 죽음이 서려 있는 이 공간 속에서도 우리는 삶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고 긍정해 나갈 수 있을까요?


정답은 '그럴 수 있다.'입니다.

그 정답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지금부터 간단히 들려드리겠습니다.


핵심 메시지 요약


1.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

2. 인간이란 존재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안다면,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3.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4. 삶에 질문을 던지지 마라, 삶이 던지고 있는 질문에 대답하라. 그 대답은 자신의 올바른 행동과 태도에서 나오며 그 올바름이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든지, 죽음이라는 '끝'을 피할 수 없고 그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은 노화, 이별, 고통 등이 도사리고 있는 가시밭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산다는 것은 이러한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그 시련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감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더욱 의문을 갖습니다.

이렇게 고통만이 가득한 삶은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어떻게 우리는 웃고 떠들 수가 있는가? 절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 힘은 바로 의미입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말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삶에 질문을 던지지 말고 스스로 질문에 대답하라고.

'왜 내 삶은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이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답해봤자 삶은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삶은 그저 질문을 던질 뿐, 대답을 해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태도에서 나올 뿐입니다.

'그래, 이 고통 속에서 나는 나의 성장을 이루겠다.'

'삶이 나에게 이렇게 고통을 던진다면, 나는 이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의지를 통해 대답하겠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 속에서라도, 나는 끝내 굽히지 않았노라고. 나의 용기 자체가 내 삶의 의미이며, 이것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등의 대답으로 말이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의미.

이 의미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를 투철하게 관철하고 내 삶에 '책임'짐으로써 얻어 낼 수 있는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적 행위로 표현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태도이자 가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 속의 문장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통제하더라도, 그 사람의 생각과 내면까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아무리 가하더라도 그것에 굴복하느냐 마느냐는 그 사람의 의지와 태도에서 나오는 문제인 것이죠. 삶이 어떤 상황과 시련을 던지든 간에,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자유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누군가는 힘들다고 울고 못 버티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누구는 묵묵히 이겨내면서 자신의 성장을 이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상황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태도의 차이에서 드러날 뿐입니다.

이 태도는 개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면서도 최후에 있는 자유이며,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삶의 태도와 의미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왜 고통은 그것을 똑바로 직면하는 순간에 사라지게 될까요?

고통을 정확히 지켜보게 되는 그 순간에, 고통은 이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인식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흐릿한 어둠은 인간에게 공포를 일으키지만 빛이 비치면서 어둠이 사라지면 더 이상의 공포가 사라지는 것처럼, 고통 또한 이와 마찬가지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앞에,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불운과 불행이 찾아옵니다.

그 불운과 불행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너져 내리고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그 불행마저 견뎌내면서 기어코 이겨냅니다.

그 사람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들의 힘은 찾아온 불행 앞에서 무너져 내리기보다, 맞서 싸움으로써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고 하는 태도에서 나온 게 아닐까요? 이 불행이 왜 주어졌는지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며 질문을 던지기보다, 그 불행을 없애기 위한 자신의 행동으로 대답했기에 불행이라는 질문을 해결한 것이죠.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미래가 있기에, 현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희망찬 미래는 현재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그러나, 만약 희망찬 미래가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불행한 것이 명확한 사실이라면? 지금의 고통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고 더 나아질 가능성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현재의 고통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게 될 것이고, 누구나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고통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의미를 찾은 사람은 어떠한 고통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한 번 찾아낸 그 의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내 삶의 방향을 비춰주는 별이 되어 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서'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죠?

삶에 질문을 던지지 말고 질문에 대답하라. 어떻게?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에 책임을 짐으로써.

맞서 싸울 것인지, 회피할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답조차도 본인이 스스로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과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그 자체만을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행복은 항상 어떤 일의 결과나 부산물로 나타납니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행복하다면, 맛있는 것을 먹었기에 행복한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사람은 자신이 어떤 걸로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길일 확률이 제일 높으니까요.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 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 영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삶도 이와 마찬가지 일지도 모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 단독으로 죽음을 대면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내 옆에 있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 단말마의 어둠 속에서 인간은 홀로 죽음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대처하며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이번 삶에서 얻고 싶은 것들을 다 얻었고, 최선을 다해서 미련이 없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설령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딱히 후회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도피하고 회피하면서 삶이 던져온 질문들을 대답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회피하다가 결국 끌려나가고 말겠죠. 하지만, 용감하게 삶의 질문들에 대답해 온 사람은 죽음이 던져오는 질문 앞에서도 의연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어쩌면, 죽음이 던지는, 삶의 가장 최종적인 질문은 이럴 것 같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았는가? 의미를 실현시켜서 행복한가?"

이 질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이미 의미 있는 삶이며 어쩌면 가장 숭고한 삶의 태도일 테니까요.


END


'삶에 질문을 던지지 마라. 삶이 던져온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의미를 찾아라. 그 의미를 찾고 실현하는 것이 삶의 행복이다.'

우리는 각자 삶에게 받은 질문이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대답을 위한 행동은 모두 똑같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어진 상황에 책임을 지고 한 걸음씩 걸어 나가는 것.


그 과정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최후에는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게 되겠죠.

이 세상에서 내가 실현시키고 싶은 것을 다 이룬 인간에게는 죽음조차도 삶과 똑같은 질문의 한 형태이기 마련이며, 그 대답은 이미 해놨을 테니까요.


죽음은 결국 삶과 떼려야 뗼 수 없는 관계이며, 죽음이 있기에 삶도 결국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삶이 영원하다면, 그 영원함 앞에서 의미는 퇴색되기 마련입니다. 떨어지는 꽃잎도 한 번만 떨어지기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처럼, 삶 또한 죽음이 존재하기에 의미가 있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죠.

그 의미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겠지만, 그 죽음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겠네요.


이상으로 <죽음의 수용소 앞에서> 리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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