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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설레는 첫 자취생활

이제야 진짜 내 청춘이 시작되는가 싶었다..

by Nos

합격 발표가 난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취방을 구하는 것이었다.

부산대학교를 가는 것도 설렜는데, 인생에 첫 자취를 시작하는 것은 더 설렜다.

처음에는 기숙사를 들어가고 싶었지만 편입생은 첫 학기에는 기숙사를 들어갈 수 없어서 아쉬웠다.

어쩔 수 없이 첫 학기는 생활비에 조금 압박이 생기더라도 자취를 하기로 했다.

사실, 기숙사 생활보다는 자취생활을 더 하고 싶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입학을 위한 서류 준비는 간단했다.

조교님께 몇 가지 서류를 이메일로 보내드리면 됐는데, 학점 인정을 위해서 직접 방문을 해야 하는 거는 조금 귀찮았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과정이고 학과에서 특별히 신경을 써준다고 느꼈기에 불만은 당연히 없었다.

또, 어차피 부동산에 들러서 자취방도 구해야 했으니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곧바로 부산으로 향하던 나는 마음이 들떴다.

부산대는 이제 더 이상 시험장소가 아니라 다니게 될 학교가 되었고 인생 첫 자취도 시작하게 되었으니.

캠퍼스 풍경은 시험을 칠 때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봤었는데, 다시 보니 넓고 예뻤다.

악명 높은 언덕길은 나에게 있어 그렇게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내가 걸어온 길이 더 언덕이 높았으니까.

아니, 사실 내가 다닐 공대 건물은 그렇게 높이 있지 않아서 딱히 힘들지 않았다.


학과 사무실은 금방 도착하였고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려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여자 조교님 두 분이 계셨는데 내 또래가 아닌 40대 분들이셨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능숙한 느낌이었다.

사무업무가 많아서 힘들 법도 한데, 꼼꼼하게 내 전적대 커리큘럼과 부산대 커리큘럼을 비교하면서 최대한 학점인정을 많이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학점인정을 덜 받아서 편입하고도 1년 더 다녔다는 후기도 인터넷에서 봤었기에 긴장했는데, 나는 66학점 정도로 아주 준수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이 정도면 커리큘럼이 꼬이지만 않으면 무조건 2년 이내에 졸업을 할 수 있기에 나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첫출발부터 단추가 잘 꿰어진 나는 기분 좋게 부동산으로 향했다.

자취방도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러나, 나는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고 내가 바라는 조건의 자취방들은 처참했다.




나는 월 35만 원 정도의 월세를 내면 10평쯤의 원룸에서 살 수 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2학기에는 기숙사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6개월 단위로 계약하고 싶었다.

월세 35만 원에 10평짜리의 원룸을 6개월만 계약.

현실은 이를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

저 조건은 내가 사는 촌동네에서나 가능한 계약이었다.


부동산에서는 고시원만 6개월 단위의 계약과 30 ~ 35만 원 정도의 월세가 가능하다 해서 고시원을 먼저 보여줬다. 3평 남짓한 고시원이었는데, 말로단 듣던 고시원을 실제로 보니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생각보다 훨씬 더 좁았던 방들은 내가 살고 싶은 방이 아니었다.

고시원에서 잘 지내고 계시는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첫 자취를 시작하는 풋내기 청춘들은 대부분 그때의 나와 똑같은 심정일 거다.


어쨌든, 나는 고시원에서는 절대 못 살 거 같았기에 6개월 계약은 포기한 채 원룸만 보게 되었다.

보여주는 원룸들은 고시원보다 훨씬 나았으나 월세가 생각보다 비쌌다. 45 ~ 50만 원까지의 방들은 확실히 살고 싶을 정도로 좋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감당하기 힘든 돈이었다.

결국, 첫 번째 부동산에서는 원하는 집들을 구하지 못해서 다음 부동산으로 향했다.


그 부동산은 꽤나 평점이 좋은 곳이었어서 약간 안심하고 갔는데, 덩치 큰 남자 공인중개사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래도, 나는 가난한 대학생이었기에 소신 있게 월세 35만 원짜리 원룸을 보여달라고 하자, 집을 하나 보여주었다. 걸어서 바로 가자고 하기에, 꽤나 가까운 곳이라 생각했던 그곳은 진짜로 가까웠다.

부동산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곳이었어서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집은 4평 남짓한 크기에 주방분리도 되지 않았던 방이지만, 월세가 싼 데다 보일러도 무료고 학교에서 엄청 가까웠다. 4평 남짓한 방이 좀 작기는 했지만, 고시원을 보고 와서 그런지 이 정도 방이면 충분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곧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지금 빨리 계약하지 않으면 방도 금방 빠질 거라는 공인중개사의 말에 홀라당 넘어갔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너무 갑작스럽게 계약하지 않았냐며 걱정하셨지만, 결과적으로는 괜찮았다.

실제로, 학기가 시작되면 방이 다 빠지는 게 사실이기도 했으니.


입학을 위한 모든 준비는 이렇게 다 끝이 났다.

3월의 새 학기가 시작되기까지 약 2주가 남았었는데, 나는 이 시간 동안 공부를 미리 하려다 포기했다.

무슨 교재를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혀서 그냥 푹 쉬기로 했다.

내가 과연 수업을 잘 따라가고 학우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되긴 했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입학 일주일 전쯤이 되었고 나는 계약한 자취방에 입주했다.

어머니가 아는 용달차 아저씨와 함께 이삿짐을 싣고 향하던 길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햇살이 잔잔히 비쳐서 그런지, 추운 날씨임에도 약간은 나른했던 도로.


부산은 생각보다 가까워서 금방 내 자취방에 도착했는데, 아저씨가 친절히 짐도 다 내 방까지 올려주셨다.

게다가, 집주인과 집주인의 아버지까지 가세해서 내 짐들을 옮겨주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남자 넷이 붙으니 짐 옮기기는 순식간에 끝났고 나는 용달차 아저씨에게 이사 비용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아저씨가 2만 원을 덜 받으셨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해주시길, 내가 너무 어리고 아들 같아서 차마 돈을 더 받을 마음이 안 드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회성이 부족해서 얼떨떨하게 감사하다고 하고 방의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짐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서 오후 내내 정리하니 얼추 다 정리가 되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내 자취방에서, 옵션으로 주어진 침대 위에 누우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4평짜리 집이지만 뭔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날의 저녁은 맛있는 걸 먹기로 했다.

생활비를 거의 다 썼기에 돈을 아끼려 했으나 이렇게 기념적인 날에는 좀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봤자 피자였지만.

용달 아저씨가 덜 받은 2만 원으로 나는 동네 피자집으로 향했다.


동네 피자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보이는 풍경들은 모든 게 다 낯설었다.

25년 동안 내가 살던 동네 주위를 거의 벗어난 적이 없었어서 그런가? 나는 새로운 동네가 마냥 신기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또 아무도 없었어서 그런지 뭔가 외롭기도 했다.

기분이 마냥 좋았다가, 또 외롭고 음울해지기도 한 이 오묘한 감정을 잠깐 즐기다가 피자를 들고 방으로 왔다.


그동안의 피자는 항상 가족끼리 먹었는데, 혼자 이렇게 먹는 기분은 약간 고독하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피자를 먹으면서 나는 다짐했다.

일주일 동안 이렇게 주변 동네와 익숙해지고, 입학하면 이제 진짜 새로운 청춘생활을 해보자는 다짐을.


그러나, 세상은 나에게 외로움을 해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학교 수업은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입 첫 학기를 온라인으로만 보내게 되었다.

즉, 자취방에서만 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과는 달랐던 첫 학기와, 자취방에서 내내 친구 없이 보내게 된 나는 외로움에 약간 무너져버렸다.

나는 이 시기에 몇 년 동안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마시게 되었고, 첫 담배도 피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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