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는 1년
코로나가 한창 심했던 시기.
모두가 다 힘들어했던 시기였지만, 편입을 하고 드디어 청춘다운 생활을 하려 했던 나에게는 특히나 더 가혹했다.
조그만 방구석에서 어떠한 사회적 교류도 없이 중간고사가 지나가버렸고 기말고사도 그렇게 훌쩍 다가왔다.
중간고사와 비슷하게 어영부영 공부했더니 성적도 딱 애매하게 나왔다.
평점도 3.3 정도로(4.5 만점) 석차도 거의 중간 등수로 나오는 성적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었고, 오히려 첫 학기라 생각하면 다음 학기에 훨씬 더 잘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수였다.
교과목도 전적대와 아예 다르고, 교수님 출제 성향도 모르고 그냥 친 시험이니.
우여곡절이 좀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잘 버텼던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이 여름방학을 정말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현장실습'이라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8월에 이루어지는 4주간의 현장실습.
12월부터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던 나에게, 8개월 만에 사람과 만날 수 있는 이 기회는 너무나도 설렜다.
우리 학과 조교님들은 학생들의 학습과 미래의 취업을 위해 굉장히 애쓰시는 정말 고마운 분들이셨다.
졸업한 선배들을 불러 세미나를 열어서 다양한 진로와 이야기들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제때에 졸업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수강한 수업들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수강과목들을 신경써주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도 정말 친절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고마운 점은 바로 '현장실습'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과목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실제로 졸업하고 나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를 '학생' 때 미리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대학교의 수업 현장과 실제 산업 현장은 차이가 너무 심하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대학들은 현장실습 기회를 취업처에서 어느 정도 제공은 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학과에서 어느 정도로 신경 써주냐에 따라 그 기회가 차이가 많이 난다.
우리 학과는 그 기회를 굉장히 신경 써서 많이 잡아주는 편이었다.
다른 학과들은 현장실습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졸업하는 학생들도 많았던 반면, 우리 학과는 본인이 관심만 있다면 1번 정도는 무조건 해 볼 수 있을 정도로.
어쨌든, 나는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내가 가장 관심 있었던 것은 현장실습을 통해 미리 내가 일 할 현장을 경험해 보는 것도, 현장실습비와 지원비를 통해 100만 원가량의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사람이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무작정 지역 내에 있는 공공기관 하나를, 그것도 대학에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지원했다.
인기 있는 기업이나 대학 근처에 있는 곳은 경쟁률이 셀 테니 나 같은 편입생은 탈락할 게 뻔했다.
내 판단은 정확히 적중했다.
너무 정확했어서 그런지, 다른 곳은 동기나 선후배끼리 둘이서 같이 짝꿍으로 가는데 나만 혼자 가게 되었다.
이 정도면.. 그냥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올해는 그냥 고독을 배우는 시기인 걸까?
결국, 나는 자취방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곳에 혼자 출퇴근하게 되었다.
내가 가게 된 사업소는 아예 공업단지가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차를 타고 1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기에 봉고차로 셔틀을 운영하고 있었다.
8시 20분쯤에 좀 일찍 갔더니, 확실하게 봉고차가 하나 있어서 들어갔다.
나이 좀 있으신 남자분이 운전사였고 그 뒤로 젊은 남자가 둘 정도 있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자, 몇몇 분 들이 더 타셨고 30분에 출발하였다.
정문 경비실에 들어서자, 다른 직원분들과 달리 나는 매일 출입대장을 써야 한다고 안내받았다.
다른 사람들이 쓴 걸 보면서 한창 쓰고 있었는데, 바로 뒤에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도 똑같이 대장을 썼다.
대장에는 외부 업체 사람들이나 나 같은 실습생들만 글을 썼기에, 나는 혹시나 싶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그분도 마찬가지로 실습생이라 하며 인사했다.
걸어가면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나보다 1살 어린 동생이었다.
인상도 동글동글하면서 귀여웠던 그 동생은 바로 나를 형이라 부르며 편하게 대하라고 했다.
혼자 긴장한 채로 실습을 받게 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같이 일하고 의지할 수 있는 실습생이 있다니!
나는 동생과 함께 사업소로 향했고, 곧바로 내가 일하게 될 부서로 안내받게 되었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글 쓰고 있는 내가 일하는 곳과 비슷한 시험분석실이었다.
부서원은 단 3명으로 전부 여자분이었는데, 한 분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었다.
부서원 중 제일 선임이었던 분이, 사업소 투어를 시켜주었는데 생각보다 넓었다.
아무래도 하수처리장이다 보니, 여기저기 처리시설들이 많았고 약간 위험할 수 있는 곳도 있어서 주의사항을 안내받았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우리가 하게 될 업무를 소개받았는데, 업무는 간단했다.
몇몇 시험항목을 보조하는 작업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쉬웠던 것 같다.
현재, 내가 매일 수행 중인 시험 업무의 1/10도 되지 않는 양을 오후까지 나눠서 했으니.
그것도 둘이서 말이다.
아무튼, 내일부터 수행할 시험업무를 간단히 소개받은 뒤에 이것저것 설명해 주시다가 첫날은 일찍 보내주셨다. 나랑 동생은 정말 일찍 가도 되는 건지 몰라서 재차 물었던 기억이 난다.
담당자님이 괜찮다고, 어차피 내일부터는 정시까지 일하고 퇴근하게 될 테니까 오늘만 일찍 가라고 해주셨다.
그렇게 떨떠름하게 인사하고, 우리는 퇴근길로 나섰다.
동생은 버스를 타고 가서, 나는 혼자 지하철에 탄 채 집 근처인 장전역까지 1시간 동안 생각에 잠겼다.
너무 긴장했어서 그런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피곤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한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나는 좀 더 친밀감 있게 일하고 행동하고 싶었는데 부서 분위기는 좀 딱딱했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나라도 그때 부서원들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4주만 잠깐 체험하고 가는 대학교 실습생들한테는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을 테니.
그렇지만, 그때의 나는 반년 넘게 사람과 소통하지 못했던 때라 일만 딱 하는 분위기가 아쉬웠다.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인 업무 시작이었는데, 나름대로 할 만했다.
지금 내가 하는 업무의 1/10 정도이니, 중간중간 쉬는 시간들이 많이 존재했고 오후 2시부터는 아예 자유시간이었다.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을 했는데, 동생은 핸드폰 게임을 했고 나는 한국사공부를 했다.
업무 시간에 치열하게 자격증공부를 하는 나를 보고, 다들 좀 놀라하셨다.
동생은 나보고, "역시 부산대생은 다르다."라면서 약간 우러러봤다.
부서원분들은, 대학생이 뭐 이리 치열하게 사냐면서 쉬엄쉬엄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학교 성적도 중간이었고, 딱히 대학생활다운 생활도 하지 못했던 나에게 뭔가 성취감을 줄만한 일이 필요했다. 학벌에 대한 열등감은 없어졌지만, 이상하게 다른 열등감이 생겨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던 시절.
나는 오후 2시부터 퇴근까지 계속해서 한국사 공부를 하고, 집에 가서도 한국사 공부를 했다.
나의 8월은 그렇게, 실습과 공부로만 채워진 단조로운 일상이 흘러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는지, 8월 말의 한국사 시험은 당당하게 90점을 받아 1급을 취득하였고 실습도 잘 마무리하여 내 한 달 생활비에 달했던 100만 원과 3학점도 취득할 수 있었다.
가장 뿌듯했던 8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쉬웠던 것은 역시,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지 못했던 점.
2학기 때는 꼭 친구를 사귀고 싶었지만, 8월에 올라온 수업별 공지는 또 나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1학기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수업으로 전부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2학기의 개강도 결국 내 자취방에서 노트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교수님들이 zoom 시스템이 익숙해져서 대부분 실시간 화상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카메라를 강제로 켜라고 하지 않았고 카메라를 안 켜도 뭐라고 하는 분들도 없었기에 나는 누워서 수업을 들었다.
누워서 수업을 들었다는 것은, 그냥 수업 시간에 누워서 잠만 자지 않았을 뿐 수업은 듣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사실, 나는 더 이상 성적을 더 잘 받을 의욕이 없었다.
그냥 내 대학생활이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뭣하러 편입을 한 건지 회의감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기 때문.
고작, 학벌 하나를 상승시키기 위해? 어차피 공공기관으로 지원할 거면 블라인드로 인해서 대학도 기재 못하는데? 나는 대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했나?
겨우 부산대라는 타이틀을 하나 얻기 위해서, 20살부터 그렇게 사람을 멀리하고 공부를 했나?
운명이란 게 있다면, 삶의 균형이 존재한다면, 이제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지 않나?
나는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겼다.
편입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내 삶은, 오히려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만약, 편입을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다가왔던 그 여자랑도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근로장학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재밌게 지내고, 친했던 여동생들이랑도 더욱 잘 지낼 텐데..
생활비도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혼자 방에서 외로워서 울지는 않았겠지.
짙은 회의감과 무력감, 외로움은 다시 한번 나를 무너뜨렸다.
나의 노력은 오히려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고작 편입 하나 때문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내 삶의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지난날을 스스로 부정하게 되자, 그때부터 나는 약간 제정신이 아니게 되었다.
집에 있는 책상을 매일마다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고, 혼잣말을 하게 되었다.
근로장학을 하며 있었던 재밌는 일들을 회상하고 상상하면서 혼자 웃다가, 방에 외롭게 누워있는 나를 자각하고 다시 울기도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폭식을 하다가, 다시 또 하루 종일 밥을 안 먹기도 했다.
잠도 하루 종일 자다가, 또 어떤 날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등 생활패턴이 점점 망가져갔다.
그러다 이상한 자기 계발과 동기부여 영상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가,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면서 핸드폰을 던지기도 했다.
배달음식을 먹다가 생활비가 부족해서 돈을 극단적으로 아끼다가도, 인생 뭐 있나 싶어서 배달음식을 다시 시키고 100만 원짜리 컴퓨터와 50만 원짜리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도 샀다.
중간고사는 당연히 망쳤다.
공부를 또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몇몇 과목은 아예 망쳐버렸고 다른 과목들은 평균을 약간 넘어서는 점수일 뿐이었다.
뭐,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그때는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공부는 모르겠고, 이 아무런 의미 없는 현재와 후회 가득한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게임만 주야장천 하기 시작했다. 강의를 듣는 시간에도 말이다.
나란 사람은 결국, 예전보다 공부를 좀만 더 했을 뿐 한심함은 여전했다.
사람이 그리우면, 그냥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는데 그건 또 하기 두렵고 귀찮아서 안 하는 나약한 사람.
게임 속 세상으로 도피한 나는 현실을 외면했다.
내 세상을 저주하며.
하지만, 사람은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
중간고사가 끝난 뒤에, 학과에서 전체적으로 공지가 올라왔다.
부분 온라인 수업을 시행한다는 말과 함께, 드디어 오프라인 수업도 병행한다는 공지가 말이다.
다른 학생들은 내심 싫어했을 공지였겠지만, 나는 기뻤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드디어, 내가 원하던 대학생활이 시작될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 생활은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그 생활은 6개월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