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만을 남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직장 에세이]
INTRO
「오늘도 마을은 돌아간다」라는 만화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좋은 기억은 그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걸!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러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걸 거야. 그러니까.. 기억은 꼭 필요한 거지.'
작중에선 별 거 아닌 상황에서 남자주인공이 의미 없이 내뱉은 대사였지만, 이상하게도 심금을 울리던 대사였습니다. 좋은 기억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말이고 맞는 말입니다.
시험연구원으로 일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되어갑니다.
인원이 꽤 자주 교체되는 부서에 있다 보니 어느새 제 밑으로 3 ~ 4명의 후배들이 생겼고 제 업무를 물려받은 후배들도 생겼습니다.
초반에는 제가 부사수였다면, 이제 제가 사수가 되어 조금 더 어렵거나 많은 업무를 맡게 되었죠.
시험업무의 특성상, 각 시험 항목은 정과 부로 나뉘어서 모든 항목에 대한 데이터가 성적서 발급일에 맞춰 나올 수 있도록 관리가 됩니다.
이때의 '부'는 최근에 인수인계를 해준 사수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정'은 지금 시험항목을 맡고 있는 담당자들이 되며 이 '정'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시험을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부'가 대신 시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입사 때부터 하던 시험항목 중 일부를 후임들에게 인수인계를 해주었기에, 몇몇 항목에 '부'로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그중에 한 항목은 부서에서도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소위 말하는 기피 항목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담당자들이 힘들어하기에, 4개월 ~ 6개월 정도만 하고 교체가 될 정도의 시험항목을 저는 8개월 넘게 했었죠. 그러다 드디어 이 시험항목을 물려받을 후임이 들어오게 되었는데, 후임이 정말 어린 사회초년생이었습니다.
이 후임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실 억울하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저는 새로운 시험항목을 인수인계받고 책임지게 되면서 바빠죽겠는데, 이 후임은 인수인계를 길게 해 달라면서 칭얼거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거의 한 달 동안 저는 기존의 업무 + 새로운 시험항목 업무까지 하면서 야근을 밥먹듯이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시험연구원들은 인수인계를 하고 받는 동안 더 바쁘기 마련이지만, 저는 안 그래도 바빴기 때문에 좀 더 힘들었습니다.
후임에게 화를 내면서 그냥 후다닥 넘기고 저의 편함을 찾을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사회초년생에게 너무 사회의 쓴맛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불편하고 짜증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저는 그렇게 그릇이 큰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저 또한 처음에 사수에게 인수인계를 받을 때 꽤 길고 자세하게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제가 지금의 후임에게 해준 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3주 동안 착실하게 받았었죠.
또, 제가 자리를 좀 오래 비운 동안은 저를 대신해서 그 힘든 시험항목을 처리해주기도 했습니다.
사수가 저에게 잘해줬던 좋은 기억이 불현듯 생각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후임에게 인수인계를 자세히 해준 적이 있는데, 그 후임도 다음 후임에게 업무를 인수인계 해줄 때 저처럼 친절하고 자세히 해주는 모습을 보며 뿌듯했던 기억도 났습니다.
제가 받았던 좋은 기억들을 그대로 물려주고, 그 기억들이 다시 다음 후임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겪은 제가 지금의 후임에게 왜 화를 내려했던 걸까요.
사회초년생인 지금 후임에게 어찌 보면 첫 사수나 다름없으며, 직장을 떠나서 인생으로써도 한참 선배인 저.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좋은 기억만 물려주는 게 선배로써의 책임감이 아닐까요?
후임이 딱히 모난 것도 없고 잔꾀 부리지도 않으며, 그저 첫 사회생활이라 서툴며 호기심이 많은 사람일 뿐인데도.. 저는 그런 걸 고려하지 못한 채 제 입장만 고려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화를 내면서 그냥 대충 넘겨버렸다면 그 당시에는 많이 편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의 이런 모습이 그 후임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좋은 기억을 못 받은 그 후임이 앞으로 누군가를 가르쳐야 될 선임이 되었을 때 좋은 선임이 될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자기는 모진 대접을 받았어도, 후임들에겐 좋은 것만 물려주자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받은 만큼만 돌려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니까요.
인수인계를 다 마친 지금은, 힘들었지만 상세히 가르쳐주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많이 힘든 시험항목이지만 자기 몫을 잘하고 있는 후임을 보며 괜스레 뿌듯하거든요.
하지만, 최근에 또 후임이 휴가를 가면서 그 항목을 하루동안 해 줄 수 없냐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부탁에 대해서 저는 사실, 좋게 좋게 돌려 말하며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냥 바빠서 결국 못했다는 말을 해도 후임은 납득했을 겁니다.
제가 하고 있는 시험항목이 많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후임들도 챙기느라 바쁜 걸 알고 있거든요.
게다가, 저 또한 하루 정도 비웠을 때는 딱히 사수가 백업을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3일 이상 비우는 게 아니라면 그 정도로 급한 시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저를 다시 돌이켜봤습니다. 제가 불가피하게 하루나 이틀 정도 자리를 비운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사수가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하루라도 안 하면 많은 양이 쌓이는 시험항목이다 보니, 누군가가 해주면 큰 도움이 되거든요.
안 해줘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럼에도 해주면 좋을 정도로 양이 많은 시험이었습니다.
부사수가 하루라도 자리를 비웠을 때, 사수가 해주는 문화를 지금의 제가 만드는 순간임을 직감했습니다.
제가 바랐던 문화였던 만큼, 제가 해주는 게 맞을 겁니다.
그래야, 지금의 제 후임도 다음 후임에게 이런 백업을 해줄 확률이 더 클 테니까요.
이 마음을 먹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바로 처음에 소개해드린 만화의 대사입니다.
'좋은 기억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
너무 큰 의미부여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어쩌면 제가 조금 더 희생하고 고생해서 만든 좋은 후임들이 지금 직장이든 다른 직장에 가든 좋은 사수가 되었을 때, 세상은 조금 더 일하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문화도, 누군가가 조금씩 좋은 모습만 남기려고 노력한 결과이지 않을까요? 여전히 보수적이고 수직적인 문화가 남은 곳도 많이 있겠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좋게 바뀌었을 겁니다.
이 모든 문화는 결국 좋은 기억을 받은 좋은 사람들이 조금씩 물려준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좀 더 좋은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리라 다짐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