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마디가 항상 어렵다.
새벽 3시 30분.
요란한 알람소리에 짜증을 내며 깨어나는 게 승현의 아침 루틴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하게 일어났다. 오늘이 빨리 오길 바라며 전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니 당연하다. 평소에는 절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
몇 달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회의도 아니고, 임원진 앞에서 중요한 발표를 하는 날도 아니었다.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랑 밤새 놀기로 한 날도 아니었다.
오늘은, 바로 퇴사를 통보하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입사한 지 이제 한 달 남짓된 승현은 아직 수습기간이었다. 일을 아직 제대로 해 보지도 않았지만, 이 일이 본인과 맞지 않다는 걸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공과는 너무 무관했고, 외근을 계속 나가야 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피곤하고 힘들었다.
게다가, 최근 회사에서 새로운 작업을 한다고 새벽부터 출근해서 일을 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었다. 아니, 새벽부터 일하는 건 상관이 없었지만 근무시간 내내 심부름에 가까운 일을 하니 회의감이 강하게 들었다.
일주일 정도는 참아봤던 승현은, 가까스로 맞이한 주말에 푹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앞으로의 미래, 방향성, 급여, 복지, 스트레스 등등을 고려하였지만 섣불리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일요일 아침부터 월요일 출근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끼고 나니 답이 나왔다. 결국 일요일 하루동안 온전히 휴식을 취하지 못한 승현은 결심이 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퇴사를 하겠다고.
대충 씻고 밥을 먹은 승현은 공영주차장으로 향했다. 오늘 부로 퇴사를 마음먹었기에 회사 차량도 반납해야만 했다. 집에서 5분 거리의 공영주차장으로 향하던 승현은 오늘따라 너무 운전이 하기 싫은 걸 느꼈다. 회사 자체에 신물이 나서 차량 자체도 건들기가 싫은 건가? 아니면 아직 피로가 좀 남아있는 걸까? 지금 이 상태로 운전을 했다가는 뭔가 큰일 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택시틀 타고 갈까 하다가, 오늘 만약 바로 퇴사를 하게 된다면 회사 차량 때문에 내일 또 차를 몰고 회사까지 와서 차량키를 반납해야 했다. 당일 퇴사는 힘들겠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차 때문에 여러모로 애매해질게 뻔했다. 결국, 승현은 오늘 무조건 퇴사하겠다는 생각을 다짐하며 대리기사를 불렀다.
어플을 키니 요금제에 따라 다양한 대리기사님을 선택할 수 있었다. 3천 원 차이로 VIP 서비스도 받을 수 있었던 승현은, 오늘만큼은 VIP가 되고 싶어 3천 원을 더 내고 불렀다. 10분 정도 기다렸을까, 멀리서 양복을 입은 대리기사님이 꾸벅 인사를 하며 왔다.
50대로 보이는, 거의 아버지뻘이나 다름없는 기사님이 와서 승현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차량 문을 열고 기사님께 안내를 한 뒤, 뒷좌석에 앉아 승현은 눈을 감았다.
승현이 딱히 술에 취해 보이지 않음에도 대리기사를 부른 것이 신기했던 것일까? 대리기사님이 먼저 말을 건넸다.
"선생님. 딱히 술 드신 거 같진 않은데, 대리 부르셨네요?"
정중하게 물어본 기사님의 말에, 승현은 딱히 기분 나쁜 구석 없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아, 네. 오늘 제가 퇴사하려고 해서, 차량을 반납하려고 하는데 뭔가 운전하기가 싫어서 기사님 불렀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저도 회사 여러 번 옮겨 다녀봐서 그 심정을 잘 알죠."
"어 진짜요?? 안 그래도 퇴사 통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뭔가 산전수전 다 겪은 듯 보이는 기사님의 말에, 승현은 조언을 구하고자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저도 몇 달 전에 조그만 중소기업을 그만두고, 이렇게 대리기사를 하고 있는데요. 별 거 없습니다 선생님. 그냥, 눈 딱 감고 말 한마디만 꺼내면 돼요. 그 이후에는 그냥 경영진이 알아서 처리하더군요. 말 꺼내는 게 어렵지, 하고 나면 별 거 없습니다."
"혹시 퇴사 사유는 뭘로 말씀하셨나요?"
"그냥 집안사정이라고 말하니깐 딱히 캐묻진 않더군요. 물론, 거짓말이고 사실은 그냥 사장도 마음에 안 들고 업무도 지쳐서 그랬죠."
"아.. 그러셨구나."
기사님의 말을 들은 승현은 묘하게 위안을 얻었다. 저렇게 나이 든 어른도 퇴사를 하고, 거짓말도 섞어가면서 퇴사하시는구나. 역시, 퇴사는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 맞았다.
사실, 승현은 어제 '잠수 퇴사'라는 걸 할까 고민 중이었다. 출근하기도 싫었고, 팀장님한테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웠기에 회사 차량과 비품들을 자리에 갖다 놓고 간단히 메모를 남겨둔 채 잠수를 탈 생각이었다.
회사 사람들이 욕을 아주 많이 하겠지만, 까짓 거 인생에서 다시 안 볼 사람들인데 신경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퇴사에 필요한 행정적인 절차가 더 필요할 수도 있었고 이렇게 비겁하게 퇴사를 하는 것은 향후 인생에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이 정도 일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잠수 타버리는 건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래서 마음을 다시 잡고, 오늘 출근을 하는 것이었다.
"퇴사 이후에 계획 같은 거는 세워두셨어요?"
대리기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직 못 세웠습니다. 퇴사하고 나서 바로 세워보려고요."
"아, 그렇게 하셔도 되겠네요. 정 안 구해지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니까요."
"네네 그러려고요. 지금 당장 너무 힘들어서 다른 건 생각할 틈이 없었네요."
승현은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였는데, 대리기사는 눈치 있게 침묵했다. 승현은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지금 자신의 결정이 맞을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지 생각했지만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차는 부드럽게, 부지런하게 운행하여 어느덧 회사 근처까지 다다랐다.
"도착했습니다. 차는 이쪽에 주차해 둘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대리기사님이 숙련된 솜씨로 주차를 해주었고, 승현은 결제를 한 뒤 조심히 들어가라고 인사했다.
오늘따라 유독 추운 새벽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입김이 저절로 나왔고, 몸이 으스스하게 추웠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5시 30분에 부장님을 만나 출발하기로 했으니 30분의 여유가 있었다.
승현은 일부러 이 여유를 만들었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와 삼각김밥을 사서 아침식사를 좀 더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오전부터 해야 할 작업이 많을 테니, 속을 든든히 채워야 손이 떨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따뜻한 커피와 삼각김밥을 먹는 순간은, 새벽부터 일어난 자신을 위한 보상이자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30분 일찍 깨어날 정도로.
그렇게, 승현은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와 삼각김밥을 손에 쥐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손안에 따스한 감촉을 즐기며 약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해야 할 사무실에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어? 일찍 왔네?"
사무실 안에는 오늘 퇴사 통보를 해야 할 이사님이 계셨다.
반사적으로 삼각김밥을 주머니에 숨기면서 승현은 느꼈다.
오늘 하루 쉽지 않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