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통보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가 제일 힘들다.
"승현아, 이것 좀 챙겨줄래?"
"넵! 알겠습니다."
삼각김밥을 먹으려던 승현은 예기치 않게 작업 전 준비물 챙기기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원래 5시 30분에 오시던 이사님이 5시에 출근을 한 덕분에.
준비물을 챙기기 위해 일찍 출근하신 이사님은 그저 성실한 직장인이었으나, 승현은 그저 짜증이 날 뿐이다.
'지금 그냥 말해버려?'
하지만, 지금 말하면 너무나도 어색한 분위기 속에 오전 내내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원래 정규 근무시간은 오전 9시부터다. 평소 같으면 아직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에 느닷없이 퇴사통보라니. 승현은 다시 생각해 봐도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승현은 삼각김밥을 아예 가방 속에 넣은 후, 본격적으로 이사님을 도와 작업을 시작했다.
5시 30분에는 출발하여 공사현장으로 가야, 협력사에서 진행하는 TBM이라는 안전 회의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후다닥 준비를 끝낸 후, 이사님의 산타페 조수석에 앉은 승현은 피곤이 갑자기 몰려오는 걸 느꼈다.
"내일까지면 이제 이 작업도 끝이다 승현아."
"아, 정말요?"
오늘이 마지막 근무이길 바라는 승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이사님은 일주일 넘게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5시까지 회사로 출근하는 이 생활이 끝나는 게 후련할 것이다. 하지만, 승현은 그냥 이 회사 자체를 나가는 게 후련할 것 같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후에는 다시 정상적으로 근무하게 될 거야."
"하하, 네.. 이사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상적인 근무시간으로 돌아온다 하더라도, 승현은 이미 마음이 떠났다. 모든 걸 고려한 뒤 빠르게 마음을 결정한 승현은 누가 말려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약간의 사담을 나눈 뒤, 둘은 침묵을 지킨 채 조용히 고속도로를 탔다. 새벽임에도 꽤 많은 차량이 도로에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새벽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에 놀랐다. 공사장에 도착하면 수많은 인부들이 더 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승현은 그런 것에 큰 감흥이 없었다. 일찍 일어나는 만큼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일 뿐, 정규 근무시간만 따지면 승현의 근무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공사장으로 향하는 길이 서서히 눈에 보였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아 어두컴컴했지만 수많은 차량들의 불빛들 이 어둠을 밝혔다. 형광 조끼를 입고 야광봉을 든 채 차량을 안내하는 신호수들이 눈에 보였다. 신호수의 안내를 받아 차량들이 빼곡한 주차장에 가까스로 주차를 한 뒤 트렁크에서 각종 작업복과 도구들을 꺼냈다. 안전모, 보안경, 안전벨트, 각반, 안전화를 신속하게 입고 회의에 참가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처음에는 10분이 걸렸지만, 이제는 5분도 걸리지 않는다.
영하의 날씨에 손은 벌써부터 얼어붙고 차가운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어우 춥다 추워. 승현아 오늘 몇 도냐?"
"지금 영하 4도 정도 됩니다."
"아, 더럽게 춥네 진짜. 날씨가 왜 이렇냐?"
"하하. 그러게요."
손바닥을 비벼봐도 차가워지지 않는 날씨에 절로 표정이 징그러워졌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사님을 뒤로, 승현도 쫄래쫄래 따라갔다. 오전 7시에 시작하는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를 위해서다.
회의 장소에 도착하니, 협력사 인부들이 눈에 보였다. 누가 봐도 노련해 보이는 숙련공들.
한 손에는 믹스커피를 들고 나머지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사람은 승현을 한 번 흘낏 보더니 다시 자신의 커피에 집중하였다.
공사 일정을 맞추기 위해 야근도 밤 9시까지 야근도 하고 주말에도 출근을 한 인부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 거친 건설현장을 버티는 것일까.
"자, 국군도수체조 시작합니다! 오와 열 맞춰주세요."
팀장으로 보이는 분이 오늘도 어김없이 앞으로 나와 구령을 시작한다. 처음에 느닷없이 체조를 할 때는 솔직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군대에서 하던 도수체조를 아침 7시부터 할 줄이야. 처음엔 어색했던 동작도,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몸에도 익고 오히려 재밌어졌다.
도수 체조 이후에는 이제 파트별로 모여서 작업 회의와 안전회의를 시작하는데, 승현은 다른 협력사로 별개의 업무를 했기에 굳이 참가할 필요는 없었다.
“승현아, 담배 하나만 피고 바로 작업하러 가자.”
“넵!"
건설현장에는 담배 피우는 곳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인부들이 대부분 남자이고 작업의 특성상 담배 피우는 남자들이 훨씬 많았다.
곳곳에 마련된 흡연장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비흡연자인 승현은 올 때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끔은 담배도 안 피우는 승현이 왜 굳이 있는지 의아하게 쳐다보는 인부도 있었으나, 이사님 옆에 붙어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이내 납득했다.
오늘도 지긋지긋한 담배냄새를 맡고, 이사님의 짐 일부를 들은 채 작업현장으로 향했다. 작업 현장은 5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건물 특성상 계단이 더 많아서 실제로는 7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을 오르고 나면, 이제 승현이 속한 회사가 담당하는 현장이 나왔다. 몇몇 장비들을 설치하고 배관, 전기선, 통신을 연결하는 게 승현의 회사가 하는 일이었다.
물론, 승현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단지, 이사님을 옆에서 보조하는 일이 전부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승현은 없어도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 인력이었다.
그저 도구를 갖다주고 청소를 주로 하는 '잡부'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꿀 빠는'업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승현은 오히려 짜증 났다.
이사님이 뭘 부탁할 때까지 그저 한 없이 대기해야 하고, 각종 심부름을 하는 업무는 몸은 편할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했다. 이건 겉으로만 보기에 편해 보이지, 실제로 해보면 정신적으로 너무 지치는 작업이다.
"승현아, 펜치 좀 줘봐."
"승현아, 케이블."
"승현아, 저기 좀 잡아볼래? 그리고 저거 좀 내려서 고정시켜 봐."
처음에는 할 만했던 보조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승현은 점점 짜증 나고 힘들었다.
특히, 이사님과 함께 작업하는 다른 작업반장님까지 승현에게 업무를 지시할 때, 승현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김 대리. 이것 좀 와서 잠깐 좀 잡아봐바~"
나이가 이사님과 비슷해 보이는 반장님은 기본적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인 건 분명했으나, 작업 스타일은 사람을 참 피곤하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작업장의 안전 수칙을 수시로 어기는 사람이었는데, 본인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서 승현에게 망까지 보게 했다. 건설현장에서 돌아다니는 안전관리자가 오면 미리 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승현은 여기서 약간 꼭지가 돌았지만, 차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게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점심시간 휴식이 없었다는 것.
정말 바쁘지 않은 이상, 다른 회사 인부들은 점심을 먹고 30분이라도 휴식을 취했다.
근로자 휴게실, 식당, 교육장 등등에서 단잠을 자는 인부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승현은 그 잠이 너무 부러웠다.
왜냐하면, 승현은 11시 30분쯤에 이사님과 다른 사장님까지 같이 내려가서 후다닥 밥을 먹고 다시 올라와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시간은 10분 남짓했고, 왔다 갔다 10분씩 하면 딱 12시였다.
이전 직장에서 꼬박꼬박 점심시간 휴식을 가졌던 승현은 이런 휴식조차 보장하지 않는 게 너무 힘들었다.
특히나, 새벽부터 일어나 작업을 시작하는 스케줄에선 더더욱.
이사님과 작업반장님은 이런 게 익숙하겠지만, 승현은 익숙할 수가 없었다.
“승현아, 작업도구들 좀 여기로 가져와보고 오늘은 작업이 마무리돼 가니까 청소 좀 힘들게 하자. 미안한데, 청소 도구 좀 빌려와 주라. “
“네, 알겠습니다.”
청소도구는 협력사 컨테이너로 가서 빌려야 했다.
다시 7층높이의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는 걸 뜻했다. 아까 올라오기 전에 가져왔으면 됐을 텐데.
평소 같으면 이런 거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퇴사를 마음먹은 승현은 짜증이 났다.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면서, 한숨을 푹 쉬고 핸드폰을 켰다.
친구들과 톡을 하고, 별 거 없는 뉴스기사를 보면서 걷는데 별안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걸으면서 핸드폰 하면 안 됩니다. 한 번만 봐드릴게요.”
발주처의 안전관리자가 승현을 쳐다보며 한 말이었다. 안전교육 때, 위험하니까 핸드폰을 걸어가면서 하지 말고 멈춰 서서 하라고 교육받은 게 기억났다.
물론, 이걸 지키는 인부들은 거의 없었다. 원칙은 그렇지만, 현장에서 누가 그 정도 안전까지 지킬까.
다만, 승현이 이런 지적을 받은 것은 만만해 보여서였음이 틀림없다.
다른 인부들에 비해 인상이 험악하거나 드세보이지 않고, 누가 봐도 그냥 어리바리한 신입처럼 보였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승현은 속에서 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퇴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별다른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집어넣고 얌전히 걸어서 협력사 컨테이너에 도착했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사무실이 텅텅 비어있었다.
승현은 사무실 안에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눈에 보였다.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가지고 나갈까?
잠시 고민하던 승현은 그냥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다른 인부들도 무작정 들고 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기고 컨테이너 밖을 나선 승현은 협력사의 안전과장과 눈이 딱 마주쳤다.
덩치가 아주 큰 과장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거 청소도구 좀 잠깐 빌려도 될까요?"
"이거 허락 없이 가져가면 안 되는데."
"아, 죄송합니다! 아무도 안 계셔서 제가 그냥 가져와버렸네요.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다음부터 조심히 빌려가세요."
과장은 힐끗 승현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항상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과장이었기에, 승현은 기분 나빴지만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인생에서 마주칠 사람이 아니다. 저 과장님 입장에선 신경이 예민해질 수 있는 부분이다. 승현은 아니었지만, 이사님과 작업반장님이 과장님 신경을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긁는걸 좀 봤으니.
승현은 빗자루랑 쓰레받기를 들고 다시 계단을 부지런히 올랐다.
"어. 승현아! 이것 좀 바로 쓸고 공구들 좀 정리해 줘. 그러고 밥 먹자."
"네 알겠습니다."
"어~ 승현 씨. 저 파이프 좀 잠깐 갖다 줄래?"
"아? 이거요? 알겠습니다."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잡일을 시키는 걸 보면서 승현은 마음이 굳어졌다.
열심히 청소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함바식당에서 밥을 후다닥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계속 생각을 정리한 승현은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잘 먹었던 밥도 지금은 속이 약간 더부룩했다. 그 많던 양을 거의 10분 만에 먹은 세 명은 자리에 일어섰다.
"어~ 이사님. 저는 제 트럭에 잠깐 들렀다가 올라갈게요. 먼저들 올라가셔요."
절묘한 타이밍에, 작업반장님이 빠져줬다. 승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사님과 함께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이사님이 담배를 다 피고 나면, 어김없이 작업 현장으로 바로 향할 것이다.
그러면 승부처는 바로 지금, 이곳이었다.
평소 같으면 담배를 피우면서도 전화를 하느라 바쁜 이사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말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승현은 지금이 딱 적절한 타이밍을 직감했다.
살짝 머뭇거렸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승현은 말했다.
"이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