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바라던 퇴사를 하다.
"응? 뭔데 승현아."
담배를 한 입 문 채 승현을 쳐다보는 이사님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승현에게는 그 눈빛이 약간 매섭게 느껴졌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저, 내일이면 수습기간이 끝나는 한 달이 되는데요. 그냥 딱 수습기간까지만 일하고 퇴사하려고 합니다.”
“으음? 진짜? 야, 그러면 어떡해.. “
생각과는 달리, 이사님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느닷없이 승현의 퇴사통보에 당황한 이사님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승현을 쳐다봤다. 그 눈빛이 눈치 보인 승현은 생각해 둔 다음 말을 꺼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집안사정도 있고, 생각한 업무와도 좀 다르다 보니 그렇게 결정하게 됐습니다.”
“하.. 혹시 지금 현장 때문에 그래? 내일이면 끝나고 우리가 이렇게 새벽부터 근무하는 일은 잘 없는데.. “
“에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새벽에 출근하는 게 힘들었으면 이미 진작에 말씀드렸습니다. 업무가 저한테 좀 많이 안 맞는 거 같습니다."
“그래, 알겠어. 일단 사장님이랑 얘기해 볼게.”
이사님의 표정을 보니 화났다기보다는 안타까움, 미안함 등이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승현은 마음속에 약간의 미안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굳게 결정한 사항이고 입 밖으로 내뱉었으니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사님을 뒤로하고, 승현은 씩씩하게 다시 작업 현장으로 올라갔다.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미안한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퇴사를 얼마나 빨리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기대감이 승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역시, 말하기를 잘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공기가 더 깨끗해지는 것도 아닌데, 속이 점점 맑아졌다.
심지어 먼지가 자욱한 건설현장임에도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승현은 작업 현장에 있는 바닥을 치우고 그냥 냅다 앉아버렸다. 원래라면 다른 인부들처럼 낮잠이라도 잘 수 있는 휴게시간이다. 현장에 앉아있는 것부터가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 승현 씨 빨리 올라왔네? “
“네, 밥 먹고 그냥 바로 올라왔습니다.”
작업 반장이 일할 때 필요한 몇몇 파이프와 공구들을 가지고 올라왔다.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워 보이는 분이었는데도, 어떻게 저런 체력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승현보다 조금 어린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렇게 열심히 일을 하시는 걸까?
“내일이면 끝난다고 하던데, 조금만 더 힘내봐요.”
“하하하, 네.”
작업반장님이 응원을 해줬지만, 이미 퇴사 선언을 한 승현의 마음에 와닿지는 못했다.
이사님이 오지 않으면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승현은 작업장 구석에서 핸드폰을 하기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한테 카톡으로 현 상황을 얘기하면서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그래, 거기서 뭐 하는 거냐. 빨리 나와서 다른 일을 하거나 좀 쉬어.’
‘다음에 술이나 한 잔 하자.’
잔소리를 할 법도 한데, 응원해 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여기저기 친구들과 톡을 하고 약속을 잡고 있는 와중에, 이사님이 한숨을 쉬며 올라왔다.
"승현아. 마무리 작업 좀 하자."
"네! 알겠습니다."
확실히,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단계라 그런지 일은 별 거 없었다.
나머지 작업을 약간 보조하고, 마무리 청소만 계속했다.
오후 3시쯤. 이사님이 승현을 부르더니 말했다.
"나는 이따가 다시 출장 나가봐야 하니까, 사무실에 들어가서 잘 마무리해. 내가 인사팀에는 얘기해 놨어."
"아, 넵!"
"사장님! 저희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예~ 내일 봐요."
작업반장님이 이사님에게 손을 슬쩍 들며 인사했다.
이사님은 가방을 집어 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가자 승현아. 가기 전에 담배 한 대만 피고 가자."
"네!"
터덜터덜 걸어가는 이사님을 뒤따라가며, 승현은 놔두고 온 게 있나 확인했다.
내일 안 나올 수도 있으니, 괜히 여기에 물품 하나 놔뒀다가 연락을 또 해야 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챙길 거는 다 챙겨놨기에 승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사님을 뒤따라갔다.
"아, 진짜 아쉽네. 여기 현장은 내일이면 끝나는데, 조금만 버티면 사무실에서 이것저것 재밌는 거 많이 할 텐데 말이야."
이사님이 진짜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하하, 뭐 그렇긴 하지만. 사실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서."
딱히, 개인적인 사정은 없었다. 그냥 여기 일이 너무 안 맞는 게 가장 솔직한 이유였는데, 괜히 그러면 붙잡을까 봐 핑계를 추가로 댄 것이었다.
"아, 그래?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긴 한데.."
그 후, 이사님은 별 말없이 담배를 피우더니 차량으로 향했다.
사무실로 복귀 후, 바로 출장을 가야 한다고 투덜거리던 이사님은 그 이후 별 말이 없었다.
1시간 동안 드라이브를 하면서 차량 안에는 라디오 소리만 울려 퍼졌다.
새벽부터 휴식시간 없이 일했던 승현은 잠이 왔지만, 그래도 마지막 예의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오후 4시 30분.
사무실 건물의 주차장에 어느새 도착한 승현은 이사님에게 인사했다.
"이사님! 그동안 감사했고, 죄송합니다."
"아이, 뭐 됐어. 건강하게 잘 지내~"
멋쩍게 인사를 한 승현은, 혼자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소문은 당연히 다 퍼졌을 것이다. 사장님이 계시면 면담 한 번 하고, 인사 담당자와 간단한 서류 작성 후 퇴사하면 끝이겠지. 꾀죄죄해진 작업복을 탈탈 털며, 승현은 남은 긴장감도 털어냈다.
조금은 뻔뻔해져도 된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잠수 퇴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당당하게 말씀드리고 퇴사하는 거니까 자신감을 가지자.
약간의 자기 최면을 한 승현은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승현이 처음 왔을 때 잘해줬던 선배님 한 분, 인사 담당자, 그리고 다른 팀 과장님이 한 분 계셨다.
사장님도 방에 계신 것 같았다.
"어! 승현 씨! 고생했어요."
"오? 승현 씨~ 소식 들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니 선배님과 인사 담당자님이 반갑게 말을 건넸다.
처음에도 승현에게 잘 대해주셨던 분들이었어서 마음이 약간 아렸다.
"아, 넵.. 그렇게 됐습니다!"
멋쩍게 말한 후, 승현은 자리에 앉아 나머지 물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켜서 자료들을 정리하고 삭제 후, 경비내역서, 차량운행서를 작성하고 법인카드와 차량키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
정리하고 있는 승현에게, 인사담당자가 슬쩍 다가왔다.
"어 승현 씨. 이거 사직서 양식이랑 인수인계서, 그리고 기타 서식들 조금 보내드릴 테니 빠르게 작성해 주실래요? 오늘까지 근무하고 퇴사하는 걸로 처리하려고요."
"헉! 넵 알겠습니다."
승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퇴사 처리를 이렇게 빨리 해줄 줄이야.
회사 입장에선 승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차피 나갈 인원 빨리 나가서 월급 안 주고 다시 채용공고를 올리는 게 이득이라 그런 거겠지. 하지만, 승현의 입장에선 이렇게 빨리 나가게 해 준다는 것만으로 고마웠다.
필요한 서류 파일을 다운로드하여서, 작성 후 인쇄하여 서명을 하고 제출했더니 5시가 약간 넘었다.
더 이상 사무실에서 할 게 없었다.
사장님이랑 면담을 할 줄 알았지만, 골치 아픈 일이 있으신지 언성 높은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수습기간 사원의 퇴사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보였다.
승현은 신경을 끄고, 남은 서류 처리에 집중했다. 이걸 다 못하면, 6시 이후까지 남아있어야 하거나 잘못하면 내일 출근해야 한다. 초집중모드로 들어간 승현은 30분 만에 모든 작업을 다 끝냈다.
시간은 오후 5시 10분.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선배님이 무슨 작업을 하길래 도와주러 갔지만, 쉬라고 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다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멀뚱멀뚱 앉아서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참 고역이었다.
퇴사까지 50분도 남지 않았으니, 그냥 밖에서 시간 때우다가 돌아오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승현은 마지막에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친구들과 카톡을 몰래 하고, 노트북을 다시 한번 쓸데없이 뒤적거리고, 화장실도 한 번 더 갔다 왔다.
그래도 시간은 5시 30분.
앞으로 30분이면 자유였지만, 이 1800초를 기다리기가 너무 힘들었다.
이제 어떻게 30분을 때워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인사 담당자님이 승현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승현 씨. 서류 처리도 다 했는데, 슬슬 인사하고 가셔도 될 거 같아요.”
“헉!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마지막으로 인사 다들 한 번씩 나누고 가요.”
승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가방을 메고 짐을 챙겼다. 가장 먼저 사장님 방에 들러 인사를 나눴다.
사장님은 약간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사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참 아쉽네.”
진짜로 아쉬워 보이는 듯한 표정에, 승현은 약간 마음이 아팠다. 따지고 보면 사장님도, 이사님도, 다른 분들도 전부 좋은 분들이었는데 본인의 부족함 때문에 이렇게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것 같았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한 뒤, 선배님과 남은 과장님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고생 많았어. 아쉽다 정말.”
승현은 인사를 다 나누고 난 뒤, 마지막으로 인사담당자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인사드렸다.
“이번 달 급여는 일주일 이내에 처리해서 메일로 급여명세서랑 원천징수영수증 보내드릴게요. 짧은 기간이지만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승현은 사무실 문 밖을 향해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밖을 나오자 찬 바람이 휭휭 불어왔다.
코 끝이 시릴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그 차가움 속에 달콤한 공기가 느껴졌다.
“하.. 진짜, 인생 왜 이렇게 힘드냐.”
당장의 퇴사는 달콤했지만, 아무런 계획 없이 시간을 보내면 큰일 나는 걸 안 승현은 앞날이 깜깜했다.
조금 더 버텨볼걸 그랬나 싶다가도, 내일 또 눈을 떴을 때는 후회했을 것이다.
설령 지금의 결정이 옳지 못한 결정이었다 하더라도 괜찮다.
본인이 한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될 만큼, 열심히 살면 되는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 오늘 밤만큼은 안식을 취해도 괜찮겠지.
모든 것을 해결한 승현은 달콤한 공기를 연거푸 마시며 집으로 향했다.
아주 추운 겨울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