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탈락

도대체 누굴 뽑는 걸까.

by Nos

무작정 퇴사를 한 승현은 일주일간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퇴사 당일 밤. 혼자서 먹기 좋은 돼지국밥집을 찾아 소주 1병을 시키고 먹을 때, 소주에서 단 맛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정신없이 소주를 마시고 나자, 취기가 확 올라왔다.

승현은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취업이 어려운 시대이지만 지금만큼은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퇴사한 곳보다 더 좋은 직장을 척척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에 근무한 곳에서 알뜰히 돈을 모으고 퇴직금도 받았으니 6개월 정도는 소득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었다.

최소 6개월. 그 시간 안에 무조건 다른 곳에 이직할 자신은 있었다.


그래서, 퇴사하고 일주일 동안은 아무런 죄책 감 없이 놀았다.

전 직장과 전전직장까지 최소 1년 6개월은 열심히 일을 했고 경력도 쌓았으니 조금은 쉬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학자금 대출이 1,000만 원가량 남아있던 승현은 지금 모아둔 생활비로 이를 상환하고 다시 일을 시작하는 건 어떨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승현은 번아웃이나 건강상의 문제로 퇴사한 게 아니었다. 일주일 쉬고 나니 몸도 마음도 다 회복이 되었고, 커리어가 약간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렇다 할 경력이 크게 없었고 슬슬 나이도 신입 나이로 치기엔 조금 많았다.

어서 빨리 적성에 맞는 업무를 하며 자리도 잡고, 학자금도 갚고 슬슬 돈을 모아야 할 때였다.


'그래, 지금 생활비로 모아둔 돈은 학자금을 다 갚는데 쓰고, 빨리 다시 취업하자.'

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제 마냥 놀기엔 30대에 접어든 승현은 오랜만에 취업 사이트에 접속했다.

마이 페이지에 들어가서 이력서란의 경력을 수정하고 적극적으로 구직 제안을 받는 걸로 설정도 바꿨다.

그 후, 승현은 기업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학력, 경력, 스펙, 나이 등을 고려했을 때 대기업은 당연히 안된다는 건 이제 안다.

중소기업부터 시작하거나 공공기관이나 재단법인의 계약직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맞았다.

계약직은 한 번 해봤고 한계를 느껴봤기에 정규직부터 먼저 찾아보기로 했다.


스펙이 꽤나 쓸만했던 승현은 대기업은 안되더라도 중견기업부터 먼저 탐색했다.

우선은 지역은 무조건 수도권, 그리고 연봉은 최소 3500 이상부터 시작하고 전공과 관련이 있어야 했다.

이렇게 필터링을 하니 지원할 만한 곳이 2개 있었다.

2개의 기업을 우선 스크랩하고 다음으로는 중소기업을 탐색했다.

중소기업은 연봉을 조금 포기하고 3,000 이상에 복지만 조금 괜찮으면 만족하는 걸로 기준을 정했다. 3,000도 안 주는 데가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공대를 나왔으니 최소 3,000 이상은 받아야 만족할 것 같았기 때문.

2시간가량 열심히 찾아본 결과 마음에 드는 곳을 7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연말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취업시장이 조금 활성화된 건지 몰라도 9군데나 지원할 만한 곳을 발견하다니.


이러다가, 백수 생활도 제대로 즐겨보지 못하고 다시 취업하는 거 아닌가? 그건 좀 아쉬운데..

아직 서류도 못 붙었지만, 서류 정도는 무조건 합격할 것이라 생각하며 승현은 이력서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인적사항, 학력, 스펙, 경력에 잘못된 게 있는지 점검했다.

자격증란에 기입한 자격증이 7개나 있는 승현은 뿌듯했다. 이 정도 스펙에 학력도 지거국이니 중견부터 중소정도는 이미 합격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아, 그래도 복지랑 연봉이나 뽀대 정도는 중견이 나으니 일단 중견만 먼저 지원해 볼까?

중소기업 채용공고의 마감일은 죄다 한 달 이상이 남아 있었다. 지원자들이 20명 이상씩 있긴 했지만, 자격증 개수나 경력들을 보니 승현이랑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어 보였다.


자신감을 얻은 승현은 이번 주는 중견기업 두 군데를 지원해 보고 면접 연락이 오면 중소기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혹여나 여러 군데에 지원하여 다 합격하면, 인사담당자들한테 뭔가 민폐를 끼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승현은 몰랐다. 자신의 이런 생각이 요즘 취업시장의 분위기를 아예 모르는 철딱서니의 생각이었음을..


이력서를 열심히 작성하고 지원동기만 회사에 맞춰 GPT와 함께 다르게 적었다.

너무 AI 티가 나는 듯한 문장과 흐름만 수정했더니 뚝딱 완성되었다. 30분 만에 두 군데 지원을 완료한 승현은 경쟁률을 봤다. 채용 공고가 올라온 지 2주가 된 두 곳은 지원자가 50명을 넘었다. 둘 다 상시채용임에도 아직 공고가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원자들이 다 변변찮았다는 거 아닐까? 이제 나를 뽑아주는 게 아닐까?

아, 여기는 뽑히면 출퇴근이 약간 번거롭겠는데, 아.. 이곳은 복지가 좀 아쉬운데?


승현은 이미 합격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듯, 합격 이후의 삶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직장 평점을 남기는 유명 사이트와 어플을 살펴보며 사람들의 후기도 살폈다.

평점은 5점 만점 중에 두 군데 전부 3점은 넘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준수했다.

나쁜 말도 많았지만, 좋은 말도 많았다. 연봉은 아쉬웠지만 워라밸 좋다는 말과 복지포인트, 중식제공과 같은 복지들이 마음에 들었다.


정규직은 중소기업밖에 다녀 본 적이 없었던 승현은 기대감에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오늘 이렇게 지원을 했으니 늦어도 이번 주까지는 연락이 오겠지.

면접 후기들을 보니, 이력서를 열람 한 지 일주일 이내에 전부 연락을 받고 면접을 본 뒤에 채용이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면접 난이도는 쉬웠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니, 연락만 받으면 합격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이미 취업 준비는 다 끝나버린 게 아닌가? 대기업을 포기하고 중견, 중소로 눈만 낮춰도 이렇게 취업이 쉽나?


자기 나이 또래들이 취업이 어렵다고 하던 게 거짓말 같았다. 정말 다들 대기업만 가려고 해서 취업난이 발생한 거였나.

대기업의 연봉과 복지를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승현도 대기업을 가고 싶었으니. 하지만, 자기 객관화를 냉정하게 한 승현은 턱도 없음을 깨닫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래도 중견정도는 만만할 것 같았다.

이 생각은 일주일 후에 완전히 바뀌었다.


다음 날, 승현은 오전에 일어나 메일을 살폈다. 이력서 열람이 되면 자동적으로 메일이 오기 때문이다. 아무런 메일이 오지 않은 걸 확인 한 승현은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오늘 그러면 뭘 해야 되지. 만약 합격하면 한 달 뒤쯤에 입사할 테니 이 기간 동안 맘껏 쉬어도 될 것 같았다.

여행을 가는 건 면접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 같으니 집에서 그냥 배달음식 시켜 먹으면서 좋아하는 영화나 보자.

그렇게, 승현은 마음 편하게 영화를 보며 하루하루를 지내기 시작했다.

이력서를 넣은 지 3일째 되던 금요일. 두 기업 담당자가 모두 승현의 이력서를 열람했다. 승현은 당일 바로 연락이 올 줄 알고 워치까지 낀 채 연락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아, 뭐 다음 주에 오겠지. 서류심사 보통 일주일 걸리잖아?’


승현은 뭔가 불길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보던 영화를 마저 봤다.

주말에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고 PC방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이 모두 퇴사 축하한다 해줬고 더 좋은 곳에 갈 거라면서 응원해 주자 승현은 또 자신감이 한껏 상승했다.

대기업도 갈 수 있는데 자신감 가지라는 친구의 말은 오버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아첨을 하는 거구나.


기분 좋은 주말을 보낸 승현은 월요일 오전부터 다시 연락을 기다렸다. 스크랩해 뒀던 중소기업들 채용 공고 기한을 보고 혹시나 새로 올라온 공고들이 없나 검색하면서.

월요일에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지원자들은 계속 늘어, 80명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승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상시채용임에도, 이력서를 열람하고 나서 따로 연락이 바로 안 오는 것은 이상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보고 연락이 안 오면 다른 곳들을 지원하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연락은 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다. 승현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스크랩해 둔 중소기업 채용공고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7군데 중에 한 군데는 갑자기 마감이 되어 열리지가 않았다. 나머지는 지원자 수가 10명 이상씩 늘어나 있었다.

아, 생각해 보니 채용을 하면 공고는 언제든지 마감될 수 있는 것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승현은 부리나케 이력서들을 다시 수정하여 중소기업 6군데에 다 지원했다. 기업 후기가 아예 없는 곳도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일단은 전부 지원했다.


그다음 날, 수요일.

6군데 중에 딱 1군데가 이력서를 열람했다. 중견기업 2군데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시 보니, 지원자수가 10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승현은 본인이 서류 탈락 했음을 그제야 받아들였다.


목요일. 중소기업 2군데가 이력서를 열람했다. 나머지 3군데는 아직 열람하지 않았고, 열람한 곳에선 딱히 연락이 오지 않았다.


금요일에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승현은 다시 채용공고를 뒤적거렸지만, 지원할 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이번 주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이 또 주말을 맞이했다.


이번 주말에는 딱히 약속을 잡지 않았던 승현은, 울적한 마음에 혼자 술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주량이 딱 1병이었지만, 그날따라 술이 잘 들어갔던 승현은 2병까지 마셔버려 완전히 취해버렸다. 다음 날 숙취로 저녁까지 고생하면서 승현은 생각했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될 거 같은데.’

저녁에 짬뽕으로 겨우 해장에 성공한 승현은 그다음 주에 분명 연락이 한 군데에서는 올 것이라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승현은 어떠한 곳에서도 연락을 받지 못했고, 나머지 중소기업은 이력서를 아예 열람도 하지 않았다. 헤드헌팅 연락도 한 군데서도 오지 않았다. 혹시, 자기가 블랙리스트라도 등록된 걸까?

새로 채용공고가 뜬 곳도 거의 없었다. 승현은 그제야 차가운 취업시장의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했고, 자신이 처음에 김칫국을 아주 거하게 마셨다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승현은 그동안, 다시 지원할 만한 곳들 6군데를 다시 찾아 이력서도 좀 더 다듬어 지원했지만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한 군데도 받지 못했다.

이력서를 열람하지 않는 기업도 있었고, 마감 후에 다시 똑같은 공고를 올리는 기업을 보기도 했다.


아직 생활비는 남아 있었지만, 이 돈은 학자금 대출을 갚는데 쓸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승현은 결국, 정규직을 포기하고 계약직과 사무보조, 아르바이트 업무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을 훔쳐 닦은 승현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 진짜 뭐 해 먹고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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