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도 가능하면 통보를 부탁드립니다.
"아으, 머리야……."
끊어질 듯한 두통에 승현이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간신히 눈을 떠 핸드폰을 확인하니 오전 8시 13분. 혼자 마시는 술은 늘 일찍 잠드는 것으로 끝이 났기에, 다행히 지독한 늦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직장인이라면 이미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을 시간, 승현은 그 당연한 일상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먼 일인지 새삼 실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난주 면접은 꽤 분위기가 좋았다. 이론적으로는 오늘 오후라도 합격 통보가 올 수 있었다. 계약직 채용이니 절차도 간소할 터였다. 오전에 마지막 면접을 보고, 오후에 내부 결재를 마친 뒤 합격자에게 전화를 돌리는 시나리오. 승현의 경험상 합격 소식은 늘 해가 중천을 지나 기우뚱해질 무렵에야 도착하곤 했다.
오전 시간은 차라리 평온했다. 승현은 기계적인 루틴에 따라 채용 사이트를 훑었다.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대기업의 공고가 눈에 띄었지만, 그는 미련 없이 창을 닫았다. 몇 번의 서류 탈락 끝에 배운 것은 근거 없는 희망 고문보다 '선택과 집중'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사실이었다.
"자격증 공부라도 더 해야 하나."
라면으로 대충 속을 달래며 승현은 중얼거렸다. 자소서도 이미 완성됐고 지원할 곳도 한정적인 상황에서, 남는 시간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건설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러나 이미 웬만한 스펙은 갖춘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종이 한 장의 자격증이 아니라 현장에서 쌓는 '경력' 그 자체였다. 신입이라기엔 적지 않은 나이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시곗바늘이 오후 2시를 가리켰다. 이제부터는 '대기 상태'다. 합격 연락은 빠르면 지금, 늦어도 퇴근 시간 전에는 오기 마련이다. 승현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업무용 스마트 워치를 꺼내 손목에 찼다. 한 달 넘게 방치되었던 기기가 서늘한 촉각을 선사했다. 일할 때 늘 차고 다녔던 그 묵직한 감각이 전해지자, 마치 벌써 출근이라도 한 듯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수험서를 뒤적거리던 그때, 손목이 요란하게 떨렸다.
지잉— 지이이잉—.
올 것이 왔다. 승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손목을 들어 올렸다. [070-XXXX-XXXX]
"아, 뭐야. 스팸이잖아."
기대는 순식간에 짜증으로 변했다. 지역 번호도 아닌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예외 없이 스팸이었다. 인터넷 가입 권유나 여론 조사 따위. 통화 거절 버튼을 누르고 나니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영화를 볼까 생각했지만, 중요한 전화를 놓칠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결국 승현이 선택한 것은 낮잠이었다. 직장인들이 식곤증에 졸고 있을 오후 3시, 승현도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꿈결인 듯 다시 진동이 울린 것은 30분 뒤였다. [010-XXXX-XXXX]
잠결에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낯선 휴대폰 번호. 이건 진짜였다.
"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김승현 씨 맞으신가요? R기관의 김성훈 연구원입니다."
R기관. 일주일 전 이력서 열람 알림만 뜨고 소식이 없길래 반쯤 포기했던 곳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들이닥쳤다. 이틀 뒤 오전 면접 일정을 잡고 전화를 끊자마자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승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R기관은 지금 결과를 기다리는 K기관보다 훨씬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전공과의 연관성이나 향후 커리어를 생각하면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만약 오늘 K기관에서 합격 연락이 오면 어떡하지?'
행복한 고민일 수도 있지만, 구직자에게는 치명적인 리스크였다. R기관 면접을 위해 K기관의 합격을 보류하거나 포기했다가, R기관마저 떨어지면 다시 벼랑 끝이다. 하필 R기관은 왜 이렇게 늦게 연락을 준 걸까.
"에휴, 김칫국 마시지 말자. 일단 되는 곳부터 가야지."
승현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통장 잔고는 비어 가고, 사회에서 격리된 듯한 소외감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그저 어디든 좋으니 자신을 이 막막한 고립에서 구원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승현은 습관처럼 다시 채용 사이트를 열었다. 검색창에 K기관의 이름을 쳤다. 그런데 목록 상단에 낯익은 공고 제목이 보였다.
"어……? 이게 뭐야."
처음엔 업무 내용이 다른 공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확인한 순간, 승현은 몸이 굳는 기분을 느꼈다.
[K기관 일반계약직 채용공고(육아휴직 대체)]
자신이 지원했던 공고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재공고였다. 오늘 오후 합격 통보를 기다리던 그 공고가, '적격자 없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낙인을 찍은 채 다시 올라온 것이다. 지원자 명단에는 석사 학위 소지자도 세 명이나 있었다. 그들 모두를 제치고 다시 공고를 올릴 만큼, 자신이 그리고 다른 이들이 부족했던 걸까.
허탈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손목의 워치는 여전히 묵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승현은 다시 취업 시장의 원점, 그 차갑고 막막한 출발선 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