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조건이랑 너무 다른데요.
K기관으로부터 정식 불합격 통보는 없었다. 하지만 채용 사이트에 버젓이 다시 올라온 공고는 그 어떤 문자 메시지보다 잔인한 선고였다. '너는 아니야.' 공고문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결국 승현은 예비용으로 두었던 R기관의 면접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 하루 전, 승현은 인공지능과 씨름하며 생소한 직무 내용을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화면 속의 정보들은 처음엔 친절한 요약본이었으나, 파고들수록 미로처럼 복잡해졌다.
"계약직 면접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구심이 들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2시간의 혈투 끝에 업무 파악을 마친 승현은 습관처럼 찾던 소주 한 병 대신 자장면 한 그릇으로 자신을 달랬다. 내일의 답변 속에 AI가 알려준 전문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섞어낼 생각을 하니, 이상한 자신감이 차올랐다. 공부를 많이 한 티를 내는 것. 승현이 터득한 '실패하지 않는 면접'의 기술이었다.
다음 날, R기관의 면접장은 숨 막히게 좁은 회의실이었다. 면접관과의 거리는 식탁 너머로 찌개를 나눠 먹어도 될 만큼 가까웠다. 부담스러운 거리감과는 달리 중년과 청년의 조합인 두 면접관의 인상은 유순했다. 준비한 1분 자기소개가 매끄럽게 흘러나갔다. 질문들은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면접이라기보다 '업무 오리엔테이션'에 가까울 만큼 분위기는 훈훈했다.
"월급은 세전 270만 원 정도로 책정될 겁니다. 경력이 있으시지만 저희 분야와는 결이 좀 달라서요."
나쁘지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승현은 이 편안한 분위기에 잠식되지 않기로 했다.
"복리후생은 어떻게 되나요?" 승현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훈훈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됐다.
면접관들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저희 기관 직접 계약직이면 복지포인트나 야근수당이 나가는데, 승현 씨가 지원한 자리는 특정 '과제 인건비'에서 나가는 거라... 그런 건 없습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해도, 내 통장에 찍히는 돈의 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 누리는 당연한 권리가 나에겐 금지되었다.
'차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자, 승현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이어지는 질문에 성의 없는 답변이 나갔다. 굳이 이런 대접을 받으며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규직과 계약직 간의 차별은 이해 가능했지만, 같은 계약직이어도 이 정도 차별은 싫었다.
월급을 주는 주체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건 안다. 그럼에도, 연봉이 3천 초중반일 때 이런 복리후생의 차이는 생활에 아주 큰 차이를 가져온다. 그래서,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채용 사이트를 뒤적였지만 세상은 여전히 불황의 늪이었다. 다음 날 오전 10시, 예상했던 '응원 문자(불합격 통보)'가 도착했다.
[김승현 님, 금번 면접에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 내부적으로 김승현 님을 판단한 결과,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김승현 님의 앞길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현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래, 곧 공채 뜰 텐데 잘됐지 뭐."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 달 뒤의 상반기 공채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오후 4시, 뭔가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김승현 님 맞으시죠? 저는 K기관 채용담당자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본인 맞습니다."
"아, 네. 저희가 최종합격 안내드리고자 연락하였습니다. 다음 주부터 출근이 가능할까요?"
"어.. 네! 가능합니다."
승현은 믿을 수 없었다. R기관은 이미 채용이 탈락한 게 아니었나?
"네, 그러면 다음 주에 출근 가능하신 걸로 알고, 입사에 필요한 몇몇 서류들 회신 주셔야 해서요. 그 부분은 메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사항은 지금 번호로 다시 연락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승현은 다시 채용공고를 살펴봤다. 오전까지만 해도 올라와있던, 승현이 지원했었던 채용공고가 갑자기 사라져 있었다.
"와, 이런 경우가 있나? 그냥 자동으로 채용공고 연장을 시켜놓은 건가."
어찌 됐든, 승현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R기관에 비해 약간은 아쉬운 연봉과 복지이긴 하지만, 출근도 가깝고 원래 했던 업무들과 비슷한 업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다시 믿을만한 수입원이 생긴 승현은 마음이 편해졌다.
약 두 달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처음의 오만했던 자신은, 취업시장에서 이리저리 두들겨 맞고 겸손해졌다. 김칫국을 참 많이 마셔서 안주가 필요 없을 정도였지.
요즘 취업시장이 정말 이렇게 살벌하구나, 경력이 정말로 중요하구나 등등을 느꼈던 승현.
이번에 근무하게 된 기관에서 마저 경력을 쌓고, 자격증도 따서 먹고 살 앞길을 개척하리라.
이런 날에는 또, 한 잔 해야 하는 법이다.
승현은 출근하기 시작하면 다시 이런 여유를 못 즐기기에 혼술을 하기로 했다.
그에게 폭풍 같은 시련이 다가올 줄은 상상도 못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