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최종면접 탈락으로 쓴 맛을 봤지만, 사기업은 생각보다 달콤했다.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 아닌 이상, 면접만 잘 보면 정규직으로 바로 합격할 수 있는 메리트는 공공기관이랑은 확실히 차별화되는 점이었다.
공공기관은 조그마한 공공기관이라 하더라도 필기시험을 봐야 했는데, 나는 필기시험 공부를 손에 놓은 지 몇 달이 지나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력을 쌓으면 발전가능성이 더 많고, 연봉이 상승할 확률도 높은 사기업이 갑자기 내 마음에 확 들어왔다. 공공기관과 달리 지원할 곳도 많고 수도권에서 근무할 수 있는 것도 너무 좋았다.
왜 그동안 굳이 공공기관을 고집한 걸까? 대체 왜?
나의 지난 2년은 그저 몇 개월짜리 계약직 경력과 인턴 6개월, 그리고 어디서 써먹지도 못하는 기간제 근로 2개.
그저 생활비만 간신히 해결했을 뿐, 미래를 위한 커리어는 쌓이지 않은 경력이었다.
다른 사기업이었으면, 여기서 1~2년 더 쌓으면 대리도 달 수 있는 시간이었다.
2024년에 29살이 된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요즘은 남자 신입사원 평균연령도 높아져서 30살 넘는 분들도 많다고 하지만, 나이 어린 신입사원을 선호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게다가 신입사원 연령이 높다 하더라도 중고신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경력을 쌓고 온 신입이라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나는 의미 없는 경력을 쌓은 29살의 남자가 되었기에 이제부터라도 의미 있는 경력을 쌓아야 했다.
인턴이나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으로써의 경력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미래가 유망하고 경력이 잘 쌓이면 발전가능성도 높으면 좋을 거 같았다.
그게 바로, 컨설팅 쪽이었다.
5년 경력만 잘 쌓아도 팀장급이 될 가능성이 높고, 금융 쪽으로 이직하면 연봉이 확 뛰는 이 세계는 나름대로 발전욕구와 성취욕구가 있었던 나에게 매력적인 세계였다.
그렇게, 나는 섣부르게 컨설팅사로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
2024년 1월의 나는 이렇게 생각을 마치고, 2월에 여기저기 찾아보면서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컨설팅사는 대부분 규모가 작기에 회사 리뷰가 적었고, 좀 괜찮다 싶으면 연봉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워라밸은 딱히 없어도 되지만, 야근하면서 야근수당도 안 주는 곳은 또 피하고 싶었다.
이것저것 조건을 고려하다 보니 지원할 곳이 다섯 손가락도 채 되지 않았다.
우선은 평점이 너무나 좋아서 의심스럽기까지 한 곳을 먼저 지원해 보기로 했다.
환경 쪽 기사 자격증 5개는 공공기관에선 정량적으로 2~3개만 취급하여 서류점수를 매기지만, 사기업은 달랐다. 뛰어난 스펙 덕분에 나는 지원하고 나서 2~3일이 지나자마자 바로 연락을 받았고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면접을 본 곳들은 대체로 규모가 큰 편이었다.
임직원이 몇 천명에 달하는 공공기관과 중견기업들을 면접을 보다가, 20명도 채 되지 않는 기업의 면접은 처음이었다.
솔직히, 규모가 작은 만큼 만만하게 본 게 사실이다.
그 만만함은 면접을 보러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더욱 커졌다.
그냥 조금 넓은 사무실 공간을 임대한 것이 전부인 듯한 오피스.
따로 회의실 공간 두 개가 있었지만 너무나 황량한 느낌이었다.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직원이 나를 회의실로 안내해 줬고, 10분 정도 대기하니 남자 두 분과 여자 한 분이 면접관으로 참석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분들은 대표님과 부대표님, 그리고 팀장급 컨설턴트로 회사에서 1,2,3인자 정도 되는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잘 몰랐던 나는 면접에 편하게 임했다.
공공기관과 달리, 면접을 본 경험이 몇 번 없으셨는지 질문들은 너무 평이했다.
직무와 관련된 전공질문도 쉬운 질문이었어서 무난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면접 덕분에 내 면접 실력이 좀 쌓였는지, 나는 면접을 보고 나서 집 근처 산책로에서 산책하다가 합격 연락을 받았다.
면접을 본 지 한 시간 만에 바로 합격 결정이 난 것이다.
정규직 전환형 인턴이었기에, 수습기간만 끝나면 바로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다음 주부터 바로 출근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백수였던 나는 가능하다고 했고 그렇게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근무경력 중에 가장 힘들었던 곳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8시 40분에 출근을 하자, 대표님과 부대표님이 회의실로 나를 데리고 가서 근로계약서 및 노트북을 지급해 주셨다. 노트북은 최신 노트북이었고, 근로계약서에도 이상한 조항 같은 것이 없었어서 괜찮았다.
나랑 같은 동기도 한 명 있었는데, 그 동기는 이전에 인턴을 6개월 정도 해 본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동기와 나는 그렇게 노트북을 지급받고, 실무에 들어가기 전에 연습용 PPT 작성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다른 대기업에 제출했던 제안서들을 똑같이 만드는 작업이라 쉬워 보였는데, 생각보다 만만찮은 작업이었다.
출근 첫날은 그렇게 하루종일 PPT를 만들고, 이튿날도 그렇게 만들다가 부대표님이 불러서 피드백을 받게 되었다. 내 동기는 이전에 인턴을 했어서 그런지, 되게 잘 만들어서 딱히 피드백받을 게 없었는데 나는 엉망진창이었다. 부대표님이 이것저것 손을 정말 많이 대셨고, 말로는 칭찬해 주셨지만 바삐 움직이는 마우스와 키보드는 칭찬과 거리가 멀었다.
남은 PPT를 마저 작성해 보라는 말과 함께,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부서에는 팀장님과 사수님 두 분이 은행 쪽에 파견을 가셔서 자리가 비워져 있어서 더욱 외로웠다.
이튿날에도 PPT만 하염없이 만들다가 퇴근을 하였고, 셋째 날에도 이렇게 피피티만 만드는 건가 싶을 때쯤 우리 부서 팀장님이 나를 데리러 오셨다.
면접 때 부대표님 옆에 앉아서 이것저것 질문을 하셨던 분이었다.
현재 프로젝트 때문에 은행 쪽에 파견을 가 있어서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이것저것 공부할 자료들을 주셨다.
그동안 만든 피피티들을 피드백해 주신 후(잘 만드셨다고 해서 의아했다.), 영어로 3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 두 개를 읽고 요약하는 과제를 주셨다.
이때부터가 지옥의 시작이었다.
파파고나 챗지피티로 영어 보고서를 번역할 수는 있었어도, 그렇게 뛰어난 번역은 아니었다.
결국 내가 단어를 하나씩 찾아보면서 독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서 할만했다.
문제는 독해한 내용이 실무와 연관되어 있는 보고서였기에, 이것을 얼마나 깊게 이해했느냐였다.
2일 동안 내내 보고서를 읽고 요약을 하고 나니, 팀장님이 오셔서 보고서 요약 브리핑을 해보라 하셨고 나는 30분 동안 설명을 시작했다. 나름대로 충실하게 잘했는지, 팀장님이 칭찬해 주셨고 우리 팀이 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내가 투입될 예정이라고 하시면서 다음 주부터 은행 쪽으로 출근을 하면 된다고 하셨다.
이렇게 첫 주는, 그냥 피피티와 보고서 공부만 하다가 속절없이 흘러가버렸다.
막막하고 힘들었는데,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은행 쪽으로 파견을 나가있다고 해서, 다른 은행사무직원과 같이 사무실을 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따로 10층에 별도의 사무실이 있었고, 거기에 3개의 컴퓨터가 세팅되어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사수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셨는데, 알고 보니 서울대학교 출신에 코딩까지 직접 하는 능력자셨다.
우리 팀장님도 알고 보니 해외 명문대 학, 석사까지 나오신 대단한 분이셨는데, 컨설턴트들은 기본적으로 학벌이 좋은 듯했다. 이렇게 능력 있는 분들과 함께라니, 내가 열심히 잘만 하면 경력도 쌓이고 앞날이 탄탄대로 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탄탄대로는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은 그 길을 걷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