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풍경은 이미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창구 직원이 몇 가지 서류만 보고 대출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이 고객의 소비 패턴, 통신료 납부 이력, 온라인 활동 같은 수십만 가지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신용을 평가한다.
그 결과, 과거라면 대출이 어려웠던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도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금융을 더 정교하게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후불 결제, 소액 대출 같은 서비스가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이제 금융의 주도권은 은행 지점이 아니라 스마트폰 속 지갑, 디지털 지갑(Digital Wallet)으로 옮겨가고 있다.
해외에서는 애플페이나 구글페이가 대표적이고, 한국에서는 네이버페이, 카카오페이, 삼성페이, 토스 같은 디지털 지갑이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
이런 지갑은 단순한 결제를 넘어 카드, 계좌, 포인트, 교통카드까지 통합해 우리 생활의 중심 플랫폼이 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디지털 마켓 법안, 즉 DMA를 통해 애플이 아이폰에서 애플페이만 쓰도록 강제하던 관행을 막아냈다.
앞으로는 은행 간 경쟁이 아니라 지갑 간 경쟁이 금융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암호화폐도 큰 변화를 맞고 있다.
한때 투기판으로 불리던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이제 제도권 자산으로 편입되고 있다.
미국은 2024년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상장지수펀드, 즉 ETF를 승인해 주식처럼 쉽게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암호화폐가 단순한 투기를 넘어 새로운 자산군으로 자리 잡는 신호였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같은 법정 화폐와 1대 1로 연동되어 가격 변동이 거의 없는 디지털 화폐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테더(USDT), 규제 투명성이 높은 USDC, 페이팔이 발행한 PYUSD, 과거 바이낸스가 내놓았던 BUSD, 그리고 탈중앙화를 지향하는 다이(DAI) 등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암호화폐 거래의 기축통화가 되었고, 국제 송금이나 결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유럽연합은 MiCA라는 역사상 첫 종합 암호화폐 규제를 시행했다. 이 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충분한 준비금을 갖추도록 요구하고, 거래소가 등록과 감독을 받도록 하며, 투자자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즉, 암호화폐가 무규제 상태에서 성장하던 시대가 끝나고, 제도권 금융의 규칙 속에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과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 즉 CBDC는 어떻게 다를까. 겉으로 보기엔 둘 다 디지털 화폐지만, 성격은 전혀 다르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 기업이 발행하고 법정 화폐를 담보로 삼는다. 반면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국가의 공식 화폐다.
세금 납부나 정부 보조금 지급 같은 공공 목적에는 CBDC가 쓰일 수밖에 없다.
스테이블코인은 국제 송금이나 블록체인 거래 같은 민간 영역에서 편리하게 활용된다. 결국 둘은 충돌하면서도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 공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때 한국과 미국의 상황은 다르다. 한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기 어렵다. 한국은행은 통화 발행은 중앙은행의 고유 권한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직접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내놓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반면 미국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이미 전 세계에서 사실상 표준으로 쓰이고 있다.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될수록 달러는 오히려 디지털 영역에서 더 강력해진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의 성장은 달러 패권을 약화시키기는커녕 단기적으로는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정치적 맥락도 흥미롭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비트코인을 강조한 것은 단순한 투자 권유가 아니다. 비트코인은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통제하지 못하는 자산이다.
트럼프는 이를 “자유로운 미국”이라는 이미지와 연결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고, 동시에 미국 내 크립토 산업과 채굴 기업을 보호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앞으로의 금융 세계에서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서 가치 저장 수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와 송금 같은 실생활 금융의 디지털 달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각국 중앙은행의 CBDC는 국가가 보증하는 디지털 현금으로 공공 영역을 담당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관리하고 최적화하는 숨은 두뇌는 인공지능이다.
인공지능은 개인의 신용을 정밀하게 평가하고, 디지털 지갑 속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금융 상품을 추천한다.
암호화폐 거래의 불법 자금을 탐지하고,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의 방대한 거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한다.
자산 운용과 투자 자문 영역에서는 로보어드바이저로 초보자도 전문가처럼 투자를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결국 인공지능은 금융의 뇌이고, 디지털 지갑과 스테이블코인, CBDC는 금융의 몸이다. 둘이 만나면서 금융은 더 똑똑해지고, 더 안전해지고, 더 개인화된 모습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미국 달러는 이 과정에서 여전히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단기적으로는 그 패권이 오히려 강화되는 모습이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순한 금융 혁신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디지털 화폐가 맞물리며 세계 질서 전체를 다시 쓰는 거대한 전환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