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치 제도에는 독특한 장치가 있었다.
바로 임금에게 직언을 올리던 사간원과, 백관을 감찰하던 사헌부였다. 두 기관을 합쳐 대간(臺諫)이라 불렀다. 여기서 ‘대(臺)’는 중국 어사대에서 유래해 조선에서는 사헌부를 뜻했고, ‘간(諫)’은 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라고 직언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대간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합쳐 부르는 말, 곧 권력과 언론을 견제하는 장치였다.
사헌부의 수장은 대사헌(大司憲, 정 2품)으로, 고려 어사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건국 직후부터 설치되었다.
사간원의 수장은 대사간(大司諫, 정 3품)이었는데, 이는 태종 10년(1410)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태종조차 불편해하여 1414년에는 사간원을 폐지해 버렸다가 곧 다시 부활시켰다. 이 과정은 사간원이야말로 왕에게는 귀찮은 존재였으나, 국가 운영에는 필수불가결한 장치였음을 보여준다.
실록을 보면 당시의 긴장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태종실록에는 사간원이 왕의 강무(講武, 군사 훈련)까지 멈추라 상소한 기록이 남아 있다. 백성의 고통을 이유로 왕의 군사 행사까지 제어하려 했으니, 태종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태종은 참다못해 사간원을 폐지했으나, 곧 다시 필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언관이 없는 정치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사간원은 왕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대사간과 사간, 정언, 헌납은 왕의 언행을 직언하고, 때로는 부당한 명령을 봉박하여 돌려보냈다. 직언의 범위는 정치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봉박은 왕명이라도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그대로 시행하지 않고 반려. 거부하는 사간원의 핵심 권한이다.
태종 12년에는 사간원이 불교 사찰인 내원당과 정업원의 폐지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도 있다. 사간원은 국가 재정과 민생뿐 아니라 종교 정책까지 간섭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목소리를 냈다. 왕의 입장에서는 불편했겠지만, 백성의 눈으로 보면 든든한 언론이었다.
그러나 이 거울은 언제나 위험했다. 세종과 성종 같은 성군은 충언을 받아들이며 정치를 다잡았지만, 연산군은 언관들을 ‘잔소리꾼’이라 부르며 가차 없이 탄압했다. 무오사화가 그 시작이었다.
연산군 시절, 사간원 정언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죽은 스승조차 무덤을 파헤쳐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의 임금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김종직의 글로서 조선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말은 없지만, 정통 군주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은 의리 없는 일이라는 암시가 담겨있다고 해석하여 당시 훈구파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등 신규 사림파를 대거 죽인 발단이 되었다.
사간원의 기록과 직언이 권력의 칼날 앞에서 무참히 꺾인 장면이었다. 이후 조광조 역시 중종 밑에서 직언하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결국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사간원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자리였지만, 동시에 역사를 움직이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헌부는 백관의 공포였다. 대사헌이 이끄는 사헌부는 관리의 비리를 파헤치고 권신을 탄핵했다. 청렴한 인물이 맡으면 나라의 기강을 세웠고, 권력자가 장악하면 사헌부는 왕의 칼로 변했다.
그래서 사헌부 출신들은 사간원 출신과는 달리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율곡 이이는 대사헌을 거쳐 정승 반열에 올랐고, 송시열 역시 대사헌을 지내며 서인의 영수로 조선을 흔드는 거목이 되었다. 사헌부는 권력의 칼이자 권력으로 가는 사다리였다.
오늘날에도 그 모습은 낯설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특정 권력기관, 특히 검찰 출신 인사들이 국가 요직을 장악하는 현실은 사헌부의 권력 집중을 떠올리게 한다. 검찰은 본래 부패를 감시하는 기관이지만, 정치와 맞닿을 때 거대한 권력이 된다.
반대로, 사간원처럼 권력을 향해 쓴소리를 하는 언론이나 지식인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왕정인 조선과 달라야 한다. 권력기관이 한쪽으로 쏠리면 결국 권력이 사유화된다. 따라서 권력기관의 분산과 민주적 통제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성숙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다양한 견제 장치를 활용할 때 비로소 권력은 균형을 찾는다.
충언을 존중하는 성군을 기다리는 시대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제도와 시민의 힘으로 권력을 다스려야 한다.
태종이 사간원을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시킨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권력자는 쓴소리를 불편해하지만, 그 목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정치는 폭정으로 기울어간다. 조선의 사간원과 사헌부는 수백 년 전 이미 보여주었다. 거울과 칼이 균형을 이룰 때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