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새벽은 피비린내 속에서 열렸다.
후삼국의 전란에서 살아남은 호족들은 성을 쌓고, 땅을 지키며, 자신만의 군사를 거느렸다.
왕건은 그들을 껴안아 고려를 세웠고, 호족들의 병력은 고려 왕조의 뼈대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들은 점차 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변해갔다.
고려 말, 권문세족들은 광대한 토지를 기반으로 노비와 농민을 사병으로 삼았다. 그들의 집에는 창과 칼이 쌓였고, 권력은 칼끝에서 자라났다.
국왕은 2군 6위라는 중앙군을 거느렸지만, 각지의 실질적 무력은 여전히 세도가의 손에 있었다.
왕자의 난과 사병의 칼날
고려 말과 조선 초, 사병(私兵)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반드시 거느려야 할 힘의 원천이었다.
지방 호족부터 개국 공신에 이르기까지, 수백에서 수천 명의 사병은 단순한 호위 무력이 아니라 권력 자체를 보증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 사병은 동시에 왕권을 위협하는 불안요소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들은 저마다 사병을 거느리며 세력을 키웠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곧바로 이 문제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개국 공신이나 왕자들이 사병을 계속 보유하는 한, 왕조의 기틀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실제로 그의 개혁안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사병 철폐였다.
하지만 이 소식은 곧 왕자들에게 전해졌고, 특히 권력에 예민했던 이방원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사병을 잃는다는 것은 곧 정치적 생존을 잃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1차 왕자의 난이 터졌다. 이방원은 자신이 거느린 천여 명의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과 남은 세력들을 기습했다.
이는 단순한 권력 다툼이 아니라, 사병을 둘러싼 생존 경쟁이었다.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이방원은 그토록 서둘러 칼을 빼들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 천여 명을 이끌고 궁궐로 들어갔다. 실록은 전한다.
“이방원이 병력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였다.” (태조실록)
그의 사병은 번개처럼 궁궐을 장악했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은 피를 흘렸다.
1400년, 다시 터진 2차 왕자의 난에서도 이방원은 무력으로 형제를 꺾고 권력을 움켜쥔다.
이방원은 누구보다도 사병의 힘을 잘 알았다. 그 칼날은 자신을 왕의 자리로 올려놓았지만,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겨눌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체험했다. 형제가 서로를 죽이고, 피가 강처럼 흐르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권근의 상소와 정종의 결단
1400년 4월, 대사헌 권근은 사헌부와 함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예기》의 구절을 빌려 사병 혁파의 명분을 제시했다.
“兵權은 國之大權也, 不可分而使人主之. 私家有兵, 則强暴僭濫, 可以威脅人君. 《禮記》曰: ‘家不藏兵.’”
(병권은 나라의 큰 권세이니 나눠 맡길 수 없습니다. 사가에 병사가 있으면 강포하고 참람해져 임금을 협
박할 수 있습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집에는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정종실록 2년 4월 6일)
정종은 세제 이방원과 상의했고, 곧 결정을 내렸다. 사병을 해산하라.
그날부터 절제사와 공신들이 거느린 군사들이 흩어졌다.
태종의 집념
그러나 개혁은 쉽지 않았다. 일부 공신들은 사병을 몰래 숨겼다. 태종실록은 기록한다.
“공신들이 사병을 숨기고 두려워하니, 태종이 이를 적발하여 다스렸다.”
태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위도총부를 설치해 군권을 국왕 직속으로 집중시켰다. 지방의 절제사들이 거느리던 무력도 국가 군사로 흡수했다.
백성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병은 부역과 징발로 민심을 괴롭혔지만, 이제 군역과 급료는 국가 제도로 일원화되었다.
칼과 창은 더 이상 개인의 힘이 아니라, 왕조를 지키는 공적 무기가 되었다.
사병의 종말
1406년, 태종은 마지막 남은 공신 세력의 무력까지 정리하며 사실상 사병 혁파를 완결 지었다.
고려 건국 이후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온 지방 호족과 권문세족의 사병 전통이,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사병 혁파는 단순한 군제 개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자의 난이 남긴 피의 교훈, 그리고 왕권을 온전히 세우기 위한 태종의 결단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짧지만 강한 문장으로 그 의미를 남겼다.
“兵權은 國之大權也.” — 병권은 나라의 큰 권세다.
왕자의 난에서 사병으로 권력을 얻었던 태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누구보다 먼저 사병을 없앴다. 그 칼날은 더 이상 형제를 겨누는 무기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왕조를 지탱하는 국가의 칼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