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태조 7년) 8월, 조선 건국 초기의 궁궐은 피로 물들었다.
역사에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단순한 형제간 권력 다툼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태조 이성계의 노년 정치,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과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무장 세력의 갈등,
그리고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조선 정치의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었다.
어린 세자와 권력 구도
태조 이성계(당시 62세)는 건국 후 불과 몇 년 만에 후계 구도를 놓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노년에 얻은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 세자 이방석(당시 16세)을 왕세자로 세운 것이다.
이 결정은 위화도 회군의 주역이자 건국 최대의 공신이었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당시 31세)을 철저히 배제했다.
정도전(당시 56세)은 세자 방석을 보호하기 위해 문신 중심의 유교적 이상 정치를 설계했다.
그의 구상은 군공과 무장 세력을 약화시키고, 재상 중심의 문치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군공을 세운 왕자들과 호족, 심지어 불교 세력까지 적으로 돌리며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긴장의 고조 ― 보호막이 사라지다
1396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자 방석의 정치적 보호막은 허물어졌다.
태조는 깊은 상실 속에 국정 의지가 흔들렸고, 궁궐은 불안에 휩싸였다.
한편 정도전과 측근들이 한 씨 소생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에 정도전은 사실상 지금의 국무총리, 비서실장, 국가 안보실장 등 실질적 요직을
모두 독점하고 있었다.
따라서 왕족들의 정치 참여 배제 및 왕족들 및 무관들이 가지고 있는 사병을 정규군으로 전환시키려 했다.
결국 이성계를 도와 왕조를 바꾼 왕족들과 무신들을 배척하고, 그리고 불교를 축소시키려는 신진 사대부들에 대한 불교계의 반감 등이 컸을 것이다.
사실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당시 이방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존을 건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
다.
사병과 무력 ― 현실 권력의 뒷배
조선 건국 직후에도 종친과 공신들은 여전히 각자의 사병을 거느렸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려 했지만, 정작 이방원은 처가 여흥 민 씨 가문(원경왕후와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지원으로
숨겨둔 무기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무관 세력의 핵심 조영무가 이방원 편에 서면서, 무력 균형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사건의 발발 ― 1398년 8월의 피비린내
1398년 8월 25일 밤, 궁궐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정도전이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
이방원 측근들은 무기를 정비했고, 민 씨 가문의 사병이 집결했다.
8월 26일 새벽, 이방원은 무인 세력과 함께 궁궐을 전격 기습했다.
( 1차 왕자의 난 사극의 한 장면)
정도전, 남은, 심효생이 차례로 살해되었고, 이어 어린 세자 이방석과 동생 이방번마저 희생되었다.
해가 뜨자,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태조는 깊은 충격 속에서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난이 있을지 3인 만에 왕위를 둘째 아들 정종에게 넘겼지만, 실권은 이미 이방원의 손에 쥐어졌다.
당시에 이방원의 친형제들과 왕족들도 사병을 동원하여, 이방원의 편에 적극 가담하였다.
1398년 8월, 하루의 기록
- 8월 25일 밤
궁궐 안팎에 불안한 소문이 퍼진다. 이방원 측근과 민 씨 가문의 사병이 무기를 들고 집결한다.
- 8월 26일 새벽
이방원, 무관 조영무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 기습.
- 새벽녘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개혁 핵심 인물들이 차례로 피살된다.
- 아침
어린 세자 이방석(16세), 동생 이방번까지 제거된다.
- 낮
태조 이성계는 충격과 무력감 속에 정사를 내려놓는다.
3일 후정종이 즉위하지만, 실권은 이방원이 장악한다.
역사적 의미 ― 이상과 현실 사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단순한 왕자들의 다툼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추구한 문신 중심의 이상 정치는 시대를 앞서 있었지만,
군공을 세운 무장 세력의 불만과 권력 현실을 무시한 채 추진되었다.
반면 이방원의 선택은 피로 얼룩졌지만, 현실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훗날 태종으로 즉위해 사병 혁파, 호패법 시행, 6조 직계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 체제를 확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이 꿈꿨던 사병 혁파는 그를 죽인 이방원의 손에서 실현되었다.
이상은 현실 앞에 무너졌지만, 현실은 그 이상을 흡수해 더 강력한 제도로 재탄생한 것이다.
1398년 8월, 조선의 새벽은 피로 물들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하루는 조선 정치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를 결정했다.
이상과 현실이 충돌할 때, 조선은 왕권 강화를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