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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왕자의 난, 왕권 강화의 분수령

by 신피질

불안한 왕위, 정종의 고민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이방석과 정도전이 제거된 뒤, 왕위는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아닌 둘째 형 이방과(정종, 당시 41세)에게 돌아갔다.


태조의 직계 중 서열로 첫째는 건국초기 1393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둘째가 사실 장남의 역할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1398년 8월 26일에 정종 즉위 이후 제2차 왕자의 난 발발한 1400년 음력 2월(정종 2년)까지 약 1년 여 기간 동안 사실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었다.


정종은 불안했다. 실권은 여전히 난을 일으킨 이방원(당시 33세)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결단을 내린다. 군권을 넷째 동생 이방간(당시 36세)에게 넘긴 것이다. 의흥삼군부절제사 직책을 내렸다. 사실 모든 군권을 책임지는 직책이다.


그런데 이방간은 직책을 받은 지 9일 만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 대목에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정종과 사전 긴밀한 연대가 없었다면, 이방간은 보직을 받은 지 9일 만에 군권을 동원해서 실권자인 이방원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종이 방간에게 군권을 주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둘째, 정종이 이방원 자신이 아닌 바로 위 형에게 방간에게 군권을 넘기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이방원이 군권을 받은 방간을 먼저 체포한 것이다. 즉 2차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고, 이것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셋째, 방간 본인은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았는데, 측근 박포, 이거이 등 무장 세력이 왕이 허수아비가 되었으니, 당신이 바로잡아야 한다고, 방간을 추켜세웠고, 방간은 왕인 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조선왕조실록은 승자 기반한 기록이기 때문에 셋째 번 시각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나는 첫째, 둘째 시나리오에 더 무게가 간다.


이방원의 세력이 이미 군부에 있었기 때문에 기밀이 누설되었고, 결국 방간은 체포되었다가 나중에 측근들에 말에 휘둘렸다고 하여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를 간다.

박포, 이거이, 이근, 유원지 등 무장세력은 처형되었다.


이는 방원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으나, 결과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방간의 야심


그는 무인 기질이 강했으나 늘 억눌림을 느끼며 살아왔다. 군권을 손에 쥐자마자 생각했다.

“이제 기회다. 방원을 제거하고 공을 세우면, 나도 왕위 계승권을 잡을 수 있다.”


『정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芫이 兵權을 專하여 潛謀不軌하니, 芫將이 多潛結焉.”

(방간이 병권을 독점하고 몰래 불법을 도모하니, 장수들이 몰래 그와 결탁하였다.)

그와 손잡은 이는 병조 무신들이었다. 염흥방, 이천우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방원의 제거에 동의하고 군을 움직였다.


1400년 정월, 칼을 뽑다


1400년 1월의 어느 밤, 방간은 군사를 몰래 움직여 방원을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계획은 비밀이 새어나갔다. 방원은 충성파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 사극 2차 왕자의 난 )



방원 편 세력: 하륜(책략가), 권근(이론가), 민무구·민무질(왕비 원경왕후 민 씨의 오라버니들), 조영무(공신)

방간 편 세력: 염흥방, 이천우 등 병조 무신


『정종실록』은 당시 상황을 간단히 전한다.

“芫이 夜潛出兵하여 欲襲芳遠, 芳遠이 預知之하고, 發兵擊破之.”

(방간이 밤에 군사를 몰래 일으켜 방원을 습격하려 했으나, 방원이 이를 미리 알고 군사를 내어 격파하였다.)

충돌은 길지 않았다. 불과 며칠 만에 방간의 세력은 붕괴되었다. 방간은 유배되었다.

정종의 퇴위, 태종의 즉위

방간의 패배는 곧 정종의 몰락을 의미했다. 왕위는 지켜낼 수 없었다.

1400년 11월, 정종은 병을 핑계로 스스로 양위를 선언했다.


『정종실록』은 전한다.

“予以病, 不可以親萬機, 芳遠賢, 宜嗣位.”

(내가 병이 깊어 정사를 볼 수 없으니, 방원이 어질어 왕위를 이어야 한다.)


그렇게 33세의 방원이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했다.


왕권 강화의 출발점

전투는 짧았지만 결과는 장기적이었다.

태종은 즉위 후 사병 혁파, 호패법 시행, 의금부 강화 등으로 왕권을 중앙에 집중시켰다. 이는 곧 세종 시기의 태평성대를 준비하는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조선 초 왕자 간 권력투쟁의 마지막 결전이자, 왕권 강화의 분수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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