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들판이나 산기슭에서 들려오는 “귀뚜르르르…” 하는 소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오래된 음악이다. 그 소리를 내는 것은 오직 수컷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날개에 있는 특수한 부위 — 한쪽의 마찰돌기와 다른 쪽의 긁개 — 가 서로 비벼지며 생기는 진동이다.
이 단순한 움직임 속에 정교한 생물학이 숨어 있다. 수컷은 밤마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노래한다. 그 울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암컷에게 보내는 구애의 신호이며 생존의 마지막 외침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은 세 가지로 나뉜다. 암컷을 부르는 구애음, 교미 직전의 부드러운 교미음, 그리고 경쟁자를 쫓아내기 위한 경계음이다. 각각의 리듬과 진폭은 수컷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암컷은 앞다리 무릎에 달린 작은 고막으로 그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고, 가장 강인한 수컷을 찾아간다. 그래서 귀뚜라미의 노래는 단지 음악이 아니라 유전자의 선택 도구다.
귀뚜라미의 울음이 밤을 채우는 동안, 낮에는 여치의 노래가 숲과 들판을 울린다. 여치와 귀뚜라미는 둘 다 ‘메뚜기목’에 속하지만, 여치는 낮의 음악가, 귀뚜라미는 밤의 연주자다. 여치는 태양 아래서 빛과 열기를 이용해 소리를 내지만, 귀뚜라미는 어둠 속에서 소리로 존재를 드러낸다. 낮에는 새와 개구리, 뱀 같은 천적이 많고 햇볕에 수분이 증발하기 쉬워 귀뚜라미는 숨어 지내다가, 해가 지면 비로소 자신의 무대를 연다. 밤의 고요는 그들에게 안전한 방패이자, 소리가 멀리 퍼지는 완벽한 무대다.
암컷은 수컷의 노래에 이끌려 다가와 수컷의 등에 올라탄다. 이 자세는 생리적으로 완벽하다. 수컷의 생식기는 복부 끝,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암컷이 위에 올라타면 수컷은 그 위치에서 정자주머니, 즉 정자와 영양분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를 암컷의 생식공에 부착한다. 교미는 몇 분 만에 끝나지만, 정자는 수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동한다. 그리고 수컷은 교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밤새 노래하며 쏟아낸 에너지와 마지막 번식 행위가 그의 생을 모두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암컷 역시 오래 살지 못한다. 교미 후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흙 속에 알을 낳기 시작한다. 암컷의 배 끝에는 바늘처럼 길고 단단한 산란관이 있다. 암컷은 이 산란관을 이용해 흙 속 3~5센티미터 아래에 알을 ‘심듯이’ 낳는다. 알은 한 번에 2~5개씩, 전체로는 100~300개에 이른다. 낙엽과 흙이 덮여 있는 그곳은 생명을 품기 위한 완벽한 보금자리다.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오면 알은 대사 활동을 거의 멈추며 휴면 상태로 들어간다. 이때 알 속 세포는 얼지 않기 위해 글리세롤과 트레할로스 같은 천연 부동액을 만들어낸다. 덕분에 외부 온도가 영하로 떨어져도 알은 얼어붙지 않는다. 흙 속 몇 센티미터 아래는 공기보다 따뜻하고, 그 안에서 알은 고요히 봄을 기다린다. 흙이 다시 따뜻해져 10도 안팎이 되면 생명의 시계가 깨어난다. 미세한 진동이 알 속에서 시작되고, 작은 유충이 껍질을 뚫고 세상으로 나온다.
귀뚜라미는 환경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곤충이다.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 어디서나 발견되며, 들판, 산속, 논두렁, 심지어 도시의 화단이나 창고, 하수구 근처에서도 살아간다. 대표적인 종으로는 집귀뚜라미, 들귀뚜라미, 두더지귀뚜라미 등이 있다. 열대 지역에는 크고 날개가 넓은 열대귀뚜라미가 있으며, 일부는 식용으로도 이용된다. 암컷 한 마리가 수백 개의 알을 낳기 때문에 개체수는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인간의 귀에는 쓸쓸하게 들리지만, 자연 속에서 귀뚜라미는 결코 희미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먹이는 주로 풀잎, 낙엽, 곡물 부스러기, 작은 곤충 사체 등이다. 귀뚜라미는 이렇게 다양한 먹이를 섭취하며 분해자로서 생태계의 영양 순환을 돕는다. 또 자신은 새, 도마뱀, 거미, 개구리 등의 먹이가 되어 먹이사슬의 한 축을 이룬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귀뚜라미는 생태계의 균형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다.
귀뚜라미의 일생은 짧지만, 그 생명력은 강하다. 암컷이 심은 알은 겨울을 견디고, 봄과 여름을 지나, 다시 가을의 노래로 이어진다. 한 세대가 모두 사라져도 그 울음은 해마다 되살아난다. 그래서 귀뚜라미의 삶은 덧없음이 아니라 순환의 완성이다.
그들은 인간 가까이에서도, 산속에서도, 심지어 열대 지방에서도 살아간다. 빛의 세계에서 여치가 낮을 채운다면, 어둠의 세계에서는 귀뚜라미가 밤을 노래한다. 그들의 울음은 빛과 그림자, 낮과 밤, 생과 사를 연결하는 자연의 리듬이다.
가을밤의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한 생명의 절정을 듣는 일이다. 그 노래에는 생존의 의지와 사랑의 열정, 죽음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이 함께 섞여 있다. 귀뚜라미는 노래로 사랑하고, 흙으로 돌아가며, 알로 부활한다.
그들의 울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삶은 짧지만, 생명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