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청계산 정상 매봉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중년의 한 남성이 배낭에서 페트병을 꺼내 고양이 사료를 덜어 주었다. 산길 어딘가에서 버려진 듯한 고양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먹기 시작했다. 요즘 산에는 사람이 버린 유기견이나 야생 고양이들이 많다. 관악산에서도 먹이를 챙겨주는 이들을 종종 본다.
그중 한 여성은 며칠 전 어미 고양이가 사냥개에 물려 죽었다며, 홀로 남은 새끼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기 위해 매일 등산길에 먹이를 들고 온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신을 향한 구도의 길과 생명을 향한 본능적 연민은 서로 다른 것인가.
나는 한동안 이 둘을 분리된 차원으로 생각했다. 신을 향한 사랑은 이성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감정을 절제하고 본능을 넘어서는 의식의 확장이라 여겼다. 반면, 본능적 사랑은 포유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감정적 반응이며, 인간이 초월해야 할 단계로 보았다.
그러나 청계산에서 본 그 장면은 그 경계를 흐렸다. 본능과 신성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근원의 두 형태였다. 하나는 생명의 지속을, 다른 하나는 존재의 초월을 향하지만, 그 뿌리는 동일하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본능과 신성은 변연계와 전두엽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변연계는 감정과 생존 본능을, 전두엽은 판단과 자기 성찰을 담당한다. 감정은 전두엽을 통해 윤리와 의미로 확장되고, 이성은 감정을 통해 인간적 깊이를 획득한다. 본능은 신성을 위한 연료이며, 신성은 본능의 완성된 형태다.
반려견은 이 두 영역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그들의 감정의 순도, 충성심, 그리고 짧지만 강렬한 생애는 인간에게 감정의 원형을 일깨운다. 동시에 인간은 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윤리적 의식과 책임을 자각한다. 반려견과 인간은 수만 년의 공진화를 통해 서로의 뇌 구조와 감정 체계를 변화시켜 왔다. 인간의 전전두엽 발달과 공감 능력은 이런 관계 속에서 강화되었다.
이성적 구도자의 길은 본능을 억누르는 과정이 아니라, 본능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비와 연민은 단순한 감정의 부산물이 아니라, 생명에 내재된 질서가 의식을 통해 확장된 형태다.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나 유기견을 돌보는 행동은 본능이자 동시에 윤리의 표현이다. 이성은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그것을 윤리적 언어로 변환시킨다.
고독은 인간이 신을 마주하는 통로이고, 사랑은 인간이 생명을 마주하는 방식이다. 고독은 사고를 깊게 하고, 사랑은 감정을 확장한다. 두 요소는 대립하지 않으며 서로를 보완한다. 반려견과의 관계는 이러한 합일을 체험하는 장이다. 그들은 인간의 고독을 감정적으로 완화시키면서, 사랑을 성찰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반려견과의 공존은 감정의 교류를 넘어 의식의 훈련이 된다. 생명의 온도와 감정의 리듬은 신을 향한 사유를 다시 현실의 삶 속으로 이끌어온다. 신을 닮는다는 것은 감정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포함해 그것을 의식의 질서 속에 통합하는 일이다. 이성은 감정의 반대가 아니라, 감정이 진화한 형태다.
인간이 반려견과 함께 느끼는 애착과 교감 속에는 이미 신을 향한 사유의 흔적이 있다. 인간은 신을 향해 걷지만, 사랑을 남긴다. 그 사랑은 본능과 신성이 합쳐진 생명의 증거다. 고독은 그 사랑을 정제하고, 사랑은 고독을 인간답게 만든다. 반려견은 그 사이에서 인간이 존재의 이중성을 통합하도록 돕는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