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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고, 진달래는 봄에 피지?

by 신피질

식물의 삶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환경 속에서 살아남고, 다음 세대를 남기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동물처럼 움직여 짝을 찾을 수 없는 식물에게 번식은 오직 꽃을 피우는 데 달려 있다. 꽃은 식물에게 교미에 해당하고, 개화의 타이밍은 생존을 좌우하는 가장 정교한 선택이다. 이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식물에게 빛은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세계를 읽고 계절을 판단하는 언어다.


식물이 읽는 빛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적색광과 근적외선은 가장 중요한 정보다. 광합성을 위한 푸른빛이 잎의 에너지 공장이라면, 꽃은 부드러운 열을 가진 근적외선에서 계절의 신호를 읽는다. 적색광은 ‘낮’을, 근적외선은 ‘밤’과 ‘그늘’을 알려주는 표시판과 같다. 특히 근적외선은 밤에 많기 때문에, 식물은 어둠의 연속을 통해 계절의 흐름을 계산한다. 그 밤의 길이를 재는 정밀한 센서가 바로 피토크롬이다.


피토크롬은 Pr(적색광형)과 Pfr(근적외선형)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빛 감지 단백질이다. 낮에는 Pr이 Pfr로 변해 활동형이 되고, 밤이 되면 Pfr이 다시 Pr로 천천히 되돌아간다. 이 되돌아가는 속도는 매우 일정하여 식물은 이를 ‘밤의 길이’를 재는 모래시계처럼 사용한다. 식물의 몸속에 태양의 일몰과 일출을 감지하는 생체 시계가 존재한다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이 시스템을 통해 식물은 자신이 언제 꽃을 피워야 가장 많은 씨앗을 남길 수 있는지를 정확히 판단한다.


피토크롬.png


개화는 피토크롬 하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낮의 신호를 ‘읽는’ CO 유전자(개화 조절 유전자)와, 꽃을 피우라는 명령을 만드는 FT 유전자(개화 유도 유전자)가 함께 작동한다. CO(개화조절유전자)와 FT(개화유도유전자)는 식물의 신경계처럼 작동하며, 빛의 신호가 잎에 닿으면 그 정보를 해석해 FT(개화유도유전자)를 켜거나 끈다. FT가 켜지는 순간, 잎에서는 ‘플로리젠’이라는 꽃 유도 물질이 만들어지고, 이 신호는 체관을 타고 생장점으로 이동해 잎대신 꽃을 피우라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의 신호가 분자 스위치를 움직여 생명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장일식물, 단일식물, 중일식물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장일식물은 낮이 길어지고 Pfr(근적외선형)이 오래 유지될 때 FT 유전자가 켜져 꽃을 피운다. 봄의 벚꽃, 개나리, 진달래, 상추, 보리와 밀 같은 식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낮이 길어지는 신호를 ‘지금이 번식의 최적기’로 해석한다. 겨울의 끝에서 잠에서 깨어난 봄꽃이 화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초봄에는 곤충이 적기 때문에, 식물은 최대한 눈에 띄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진달래가 잎보다 먼저 꽃을 터뜨리고 선명한 붉은빛을 띠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부족한 곤충을 유혹하기 위한 전략이다.



반대로 단일식물은 밤이 일정 길이 이상 길어야 개화를 시작한다. 국화, 코스모스, 벼, 콩 같은 식물이 이에 속한다. 특히 벼는 여름의 강력한 햇빛 속에서 한껏 성장한 뒤, 가을로 넘어가 밤이 길어지는 순간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다. 단일식물은 “어둠이 충분히 이어졌다”는 신호를 번식의 시기로 해석하는데, 이는 동남아·중국·인도 등 원산지 지역의 기후 특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몬순 지역에서는 여름이 지나야 기후가 안정되고, 이 시기가 곡물 성숙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장일 식물.png


중일식물은 장일과 단일의 중간에 존재한다. 이들은 밤이 너무 길어도, 너무 짧아도 개화하지 않고 특정 범위 안에서만 꽃을 피운다. 해양성 기후나 변덕스러운 대륙성 기후, 고산지대처럼 중간 시기에 기후가 가장 안정적인 지역에서 진화한 형태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물이 중일식물(또는 중성식물)에 속한다. 장미, 토마토, 감자, 옥수수, 해바라기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중일식물은 ‘빛의 길이’보다 온도, 수분, 광합성 조건에 더 민감하여 다양한 환경에서 번식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고 있다.


꽃의 시기는 열매의 성질에도 이어진다. 장일식물의 열매는 여름 햇빛 아래에서 익어 당도가 높고 부드럽다. 사과, 복숭아, 포도처럼 동물이 먹고 씨앗을 퍼뜨리게 만드는 전략이다. 반면 단일식물은 가을의 짧은 시간 안에 씨앗을 완성해야 하므로, 벼·콩·해바라기처럼 단단하고 저장력이 높은 씨앗을 만든다.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 이들은 겨울을 버티는 생명의 저장고다. 꽃의 계절은 곧 열매의 철학을 결정한다.


식물이 언제 꽃을 피우는가는 단순한 계절의 장식이 아니다. 그 식물이 태어난 땅의 기후, 빛의 질, 밤과 낮의 리듬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에 대한 오랜 기억이다. 식물은 자신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주어진 환경을 정확히 읽어야만 살아남고 다음 세대를 남길 수 있다. 피토크롬과 CO·FT 시스템은 그 기억을 세포 속에 새겨 넣은 분자 언어이며, 꽃은 그 언어가 외부로 드러난 형식이다.


우리가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피는 꽃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는 사실 식물이 빛의 언어를 어떻게 읽어왔는지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빛은 식물에게 시간이고, 밤은 계절이며, 꽃은 그 시간표를 따라 쓰인 생명의 문장이다. 식물은 낮과 밤의 길이를 세며,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순간에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순간은 결국 수십만 년 동안 그들이 지구의 기후 속에서 쌓아온 진화의 결론이다.


진달래와 코스모스는 서로 반대의 계절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모두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가장 많은 씨앗을 남기기 위한 지혜로운 결론이었다.


진달래는 한반도와 만주, 시베리아 남부에 이르는 북방성 기후에서 진화한 식물이다. 이 지역은 겨울이 길고 춥고, 봄은 짧고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여름은 빠르게 뜨거워지기 때문에 번식의 기회는 겨울과 여름 사이의 아주 짧은 틈에 집중된다. 진달래가 봄이 오자마자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낮이 조금만 길어지면 개화 신호가 켜지는 ‘장일식물’의 전략을 따르는 진달래는, 햇빛이 투명하게 땅까지 내려오는 초봄을 놓치지 않는다. 곤충이 적은 시기에도 화려한 꽃색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며, 경쟁이 거의 없는 시기에 안정적으로 수분과 번식을 마친다.


반대로 코스모스는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열대·아열대 지역에서 진화한 식물이다. 이 지역은 여름이 길고 뜨겁고, 강렬한 햇빛 아래 빠르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번식을 위해서는 기온이 안정되고 밤이 길어지는 가을이 가장 적합하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밤이 일정 길이 이상 길어졌을 때 개화를 시작하는 ‘단일식물’의 전략을 선택했다. 여름 동안 충분히 성장한 뒤, 빛이 줄어드는 가을의 신호에서 비로소 꽃을 피우고 종자를 완성한다. 가을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모습은 바로 이 긴 준비와 계절의 선택이 만들어낸 생태적 결실이다.


진달래와 코스모스의 차이는 결국 ‘빛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결정된다. 진달래는 낮이 길어지는 신호를 읽고 봄을 선택한 식물이며, 코스모스는 밤이 길어지는 신호를 읽고 가을을 선택한 식물이다. 두 꽃이 서로 다른 계절에 피는 이유는, 각자가 태어난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가장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결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계절의 풍경 속에서 매년 다시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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