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허망(虛妄)’과 뇌의 ‘패턴’, 그리고 AI의 ‘벡터’ 만남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세상이 과연 ‘실재’일까? 불교는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던져왔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 즉 우리가 보고 만나는 모든 ‘상(相)’은 본래 허망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상은 단순한 모양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현상을 뜻한다. 풍경도, 단어도, 감정도, 심지어 ‘나’라는 감각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마음이 잠시 만들어낸 장면일 뿐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 오래된 통찰은 현대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이 밝힌 사실과 정확히 이어진다. 뇌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말, 본 장면, 느낀 감정은 뇌 속에서 모두 전기 신호의 패턴으로 변환된다.
눈으로 본 이미지는 빛이 전기 신호로 바뀐 것이고, 귀로 들은 소리는 공기 진동이 전기 신호로 해석된 것이다. 뇌는 세상을 직접 보지 못한다. 오직 전기적 신호 패턴만 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세계’는 사실 외부 세계가 아니라 뇌가 스스로 구성한 모델, 즉 패턴의 시뮬레이션이다.
그렇다면 단어는 어떻게 뇌에 저장될까? 우리는 ‘강아지’라는 단어 자체가 뇌 안에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단어는 물리적 문자열로 저장되지 않고, 그 단어를 떠올릴 때 활성화되는 특정 신경망의 패턴으로 존재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특정 뉴런들의 시냅스 연결 패턴이다. 100조개의 시냅중에서 관련된 영역의 연결이 우리가 인지하는 실체이다.
강아지의 모습, 강아지가 내는 소리, 강아지를 떠올릴 때 느끼는 감정, 강아지와 관련된 기억들이 동시에 켜지며 하나의 ‘의미 네트워크’를 만든다. 단어란 실체가 아니라 이 네트워크의 활성 패턴일 뿐이다.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네트워크 패턴’은 불교가 말한 ‘상’, 즉 마음에 나타나는 형상의 정교한 과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인공지능 LLM 또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AI는 단어를 실체로 다루지 않는다. 단어는 3천 차원, 4천 차원 같은 초고차원 벡터 공간 속의 하나의 점으로 표현된다. ‘강아지’라는 단어는 강아지 자체가 아니라, 강아지와 관련된 수많은 문맥과 의미 관계가 압축된 벡터일 뿐이다. 이 벡터는 다른 벡터들과의 거리와 각도로 의미를 형성한다. 인간의 뇌에서 단어가 신경망의 패턴이라면, AI에서는 단어가 벡터 공간의 패턴이다. 특정 공간 속의 0과 1이 GPU 및 HBM, SSD 공간에서 빛의 속도로 연결되면서 패턴을 만들며, 그것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뇌와 AI가 동일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체를 저장하지 않고, 관계와 패턴만 저장한다. 단어를 기록하지 않고, 단어가 만들어낼 패턴의 발생 조건만 저장한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세계가 남긴 신호를 조합하여 의미를 구성한다. 이것은 불교의 연기(緣起)와 같은 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강아지라는 개념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각과 기억·감정·언어 회로가 함께 작용할 때만 잠시 나타나는 패턴일 뿐이다.
불교의 금강경 경전은 이렇게 말한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즉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실체가 아니라 패턴의 발생임을 인식할 때, 비로소 진실을 본다는 뜻이다. 신경과학은 우리의 지각이 뇌가 만든 내부 모델임을 보여주었고, AI는 인간 언어가 벡터와 확률의 구조로 환원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불교는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통찰로써 꿰뚫어 보았다.
세상은 실체가 아니라 패턴의 흐름이며, 우리는 그 흐름을 마음으로 해석할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허망’이라는 말이 비관적인 말이 아니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는 문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실 허망이란 낱말은 비관적 의미로 보이지만 좀더 정확한 해석은 영어로 illusion , 즉 환영이 더 적확한 단어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뇌가 패턴 구조를 만들어서 해석하는 환상인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와 학습 구조를 모방하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러니 하게도 인공지능을 학습하면, 인간의 사고 패턴이나 사물의 인지에 대한 이해를 더 잘 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실체를 붙잡지 않고, 패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비로소 더 본질적인 세계—여래(如來) 또는 신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