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길 맨발 걷다. 14코스

by 한재영 신피질

< 이미 올렸던 글인데, 연재의 연속을 위해서 다시 올립니다>


어제 숙소인 오름 펜션은 깨끗하고 조용해서 밤새 푹 잘 수 있었다. 코 막힘 외에는 감기 증세도 거의 사라졌고, 가슴의 통증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일은 대부분 걱정으로 가득하지만, 알고 보면 기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룽지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출발했다. 저지리는 마을회관 옆 실내 게이트볼링장을 비롯해 설렁탕집, 중국집, 메가커피 등 식당과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용수포구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금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먹고 자는 것이 대부분이다. 밖에 나오면 본능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하나 보다.


어제 오후 5시경 저지리 둘레길 센터에서 숙박 시설 명단을 보고, 몇 군데 전화를 했지만, 숙소를 찾지 못했다. 올레길 센터 직원이 친절하게 도와줬지만 아쉽게도 전화로는 숙소를 찾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찾다가, 우연히 처음으로 숙박 및 여행 플랫폼을 활용하여 예약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여행을 자주 가지 않아서 여행 관련 앱을 활용하지 안 했는데, 한 번 해보니 무척 편하다. 남은 여정은 미리 엡에서 예약하고 편안 마음으로 다닐 수 있겠다.


요즘은 숙박시설 전화번호를 확인하거나 직접 예약하는 일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정보가 여행 플랫폼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플랫폼 업체들이 이미 정보를 장악한 셈이다.



흰 메밀꽃이 만개한 밭 옆 돌담에 걸터앉았다. 흐린 날씨 아래, 노란색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보리밭이 바람결에 물결친다. 그 위로 몇 마리 제비들이 파도 타듯 유영하고, 바람은 나뭇가지와 풀잎을 흔들며 얼굴과 눈썹을 스친다.


한 시간 반 가량 저지대의 구불구불한 시멘트 길을 걸었다. 길 좌우는 거의 대부분 귤 밭과 귤 하우스다. 견고하고 높은 하우스는 성곽처럼 위압적이고,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어렵다.

지하에 물 저장 시설을 시공 중인 곳도 있고, 커다란 플라스틱 통이 입구 옆에 놓인 비닐하우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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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감귤과 야생의 찔레꽃


제주 감귤은 이제 서민의 대표 과일이 되었다. 한때 임금님이 먹던 귀한 과일이 이렇게 널리 퍼진 데는 과학의 발전과 유통 인프라의 기여가 크다. 2023년 기준으로 제주 감귤의 총수입은 1조 3천억 원에 달하며, 이는 제주 농업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귤나무 없는 제주 풍경은 밋밋할 것이다. 단단한 줄기와 진한 녹색의 두툼한 잎, 흰 쌀 튀밥 같은 꽃망울은 청정한 기운과 생명력을 전해준다. 귤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힘이 솟는다.



귤나무가 인간이 이루어 놓은 인공의 세계라면, 찔레꽃은 가장 야생다운 꽃이다.

제주 시골길은 온통 찔레꽃 천지다. 흰 꽃은 녹색 배경에서 가장 잘 드러나, 벌과 나비의 눈에 띄기 좋다.

감자 꽃, 메밀꽃, 매화, 배꽃, 감나무, 귤 꽃 등 대부분 흰색이니, 자연의 선택이 아닐까? 백옥 같은 여인의 살결도 본능적으로 끌리는 이유가 있으리라.

찔레꽃은 향기마저 강해서, 주변의 벌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듯하다.



오늘도 혼자 걷는다. 수없이 펼쳐지는 밭과 하우스에 농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나 혼자 심심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흉내 내보는 휘파람은 얼추 새소리처럼 느껴진다.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 ” 이 휘파람 흉내도 위대한 생각일까?


표지판의 또 다른 문구도 떠오른다. “이 길이 끝나면 새로운 길이 시작되고, 그 끝엔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 ” 하지만 나는 희망을 쫓기 위해 걷는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자연 속에 흩뿌리듯 걷고 있다. 바람, 돌, 나무, 하늘, 구름, 새, 고요한 호흡,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탈리아인처럼 보이는 중년 남녀 한 쌍이 가볍게 지나간다. 하마터면 큰 소리로 새소리 흉내를 내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뻔했다.

깊이 5미터, 폭 10미터의 인공 건천 ‘무명천’을 따라 30분 이상 걸었다. 맨발 걷기에 좋은 길이다. 토끼풀과 잔디가 발바닥을 부드럽게 감싼다.




마주 오는 젊은이가 검은콩처럼 생긴 열매를 건넨다.

상동이라 한다. 길가에 아주 많이 열려 있어, 비닐봉지에 가득 땄다고 하며, 남자에게 좋다고 한다.

십여 분 가다 상동나무를 발견했지만, 그 청년이 이미 많이 땄는지 듬성듬성 달려 있어서, 몇 개 따먹다가 말았다. 너무 작아서 간에 기별도 안 온다.

야생의 상동은 오래전 보리가 여물기 전 보리고개를 지날 때 엄마가 배고픈 아이에게 상동을 가리키며 “여기 먹을 게 있네” 하며 허기를 조금 달랜 고마운 열매라고 한다.

상동열매


이어 나타난 까마귀쪽나무는 검은콩과 비슷한 열매가 많이 달려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제주까마귀 쪽 나무열매 가루로 팔리고 있다. 열매가 익으면 사람이 먹기 전에 까마귀가 쭉 하고 잘 따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주해녀들이 관절에 좋다고 차로 많이 마신 열매라고 한다.

한 개 따서 맛을 보니, 상동 열매와 달리 비릿하고 전혀 맛이 없다. 생 콩을 먹은 느낌이다.


상동, 아로니아, 까마귀쪽나무열매 등을 만지다 보니 문득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의식과 환경이 바뀌면 생기가 되살아나는 법이다. 지치고 힘들 땐 가만히 있지 말고 자연에 몸을 맡겨보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 사람 속에는 나이만큼 많은 다양한 사람이 들어 있는 듯하다. 어떨 때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가, 또 어떨 때는 젊은 여인에 눈길이 가는 청년이었다가, 일에 대한 왕성한 의욕이 있던 장년이었다가, 세상일에 달관하고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고로 시간을 보내는 노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나이가 들었다고 스스로 노인이라고 단정하면 안 될 듯싶다. 내 안에 천 개 만 개의 얼굴이 들어 있다. 그것 모두가 나인 셈이다.


까마귀쪽열매는 관절염, 근감소증, 면역력 강화에 좋고, 상동은 블루베리보다 항산화 효과가 두 배나 높다고 한다.


월령리 마을 해안가 선인장 군락지


해안가 월령리 마을이다. 이곳에는 선인장 열매 공판장이 있을 정도로 선인장 군락이 있는 곳이다.

마을 집 돌담에 선인장이 장미꽃처럼 넝쿨지고 녹색의 두꺼운 잎과 군데군데 붉은 작은 열매들이 색다른 멋을 만들었다.

담장 위 선인장을 만져서 이파리를 으깨어 보니 두꺼운 속이 셀룰로이드처럼 자연이 아닌 막 공장에서 제조된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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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확인하려고, 탁구공보다 작은 붉은 열매를 손으로 으깨니, 붉은 물이 나와서 손톱과 손가락을 벌겋게 물들여, 마치 어렸을 적 봉숭아 물들인 듯하다.


월령리 해안가 선인장 군락지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국내 최대 규모의 선인장 군락지이다.

바닷가로 죽 이어진 야생선인장이 바닷바람을 피하려고, 낮게 엎드린 채 바위 돌 틈 사이에서 서로 의지하며 수백 년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나 있는 선인장이 제주도 척박한 용암 돌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해안가 앞 작은 식당에서 점심으로 자라돔 물회를 먹었다. 자라돔은 가시가 많아, 이가 튼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식당에서 나오다 전시된 김아영 할머니에 관련된 그림책을 보았다.


제주 4. 3 사건 때, 어린 초등학생 김아영이 집에 있는 식량을 가지러 가다 토벌대 군인이 쏜 총알이 턱을 관통했다. 턱이 붕괴되었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턱의 상처가 곪았다. 그것을 혼자서 소독했다.

외출할 때는 항상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다녔다. 시장에 오면 무명천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비극이 지난 이곳 해안가는 검은 용암, 녹색 선인장, 붉은 열매, 회전하는 풍력발전기,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풍경이 신비롭고 상큼하다.



금능 해수욕장과 협재 해수욕장 백사장을 맨발로 걷고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발은 시원한 바닷물과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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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과 발랄한 학생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낸다.

부탁해 처음으로 한 여학생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찍힌 첫 사진이다.

협재 해수욕장을 배경을 한 사진이다.

한림항까지 이어지는 해안 길. 양식장과 어촌 특유의 비릿한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어깨와 다리가 조금씩 뻐근하지만, 걸음은 여전히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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