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올레길 시리즈 연속을 위해 다시 올립니다)
어젯밤 밤새 뒤척였다. 맨 발로 7시간 걸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AI 추천으로 11코스 종점 무릉외갓집 근처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기로 했다. 도로 옆, 낡은 집이라 느낌이 안 좋았지만, AI가 우선순위로 추천해서 숙소로 정했다. 농가의 작은 임시 건물인데, 방 하나에 이층 침대 두 개가 있어 4명이 잘 수 있는 방이다. 작은 동네라 숙박시설이 많지 않을 듯해서, 돈을 추가로 내고 혼자서 자기로 했다. 나이를 먹으니, 남들과 한방에 자기가 꺼려진다.
잠자려고 눈을 감자, 낮에 본 모슬봉 묘지의 기억과 곶자왈의 음산한 기운이 기억되고, 다른 잡념도 인다.
잠들려고 애쓰고 있는데 숙소 들어올 때 짖지 않고 순해 보이던 개가 2~3분 간격으로 죽어라 계속 짖는다. 마치 어둠에 두려워 발악을 하며 내는 비명 소리 같다. 너무 시끄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마치 소리가 들어와 두개골을 찢는 듯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깊게 잠들어 기척도 없다. 참다못해 문을 열고 나가서 개를 향하여 등산 스틱으로 위협하며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짖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30분 정도 조용하다가 다시 짖는다. 참다못해 한번 더 등산 스틱을 강하게 휘두르니, 겁을 먹고 집 뒤 쪽으로 피한다.
하늘을 보니 별이 듬성듬성 보인다. 구름이 있고 미세 먼지 많아 별이 잘 안 보인다. 감기 기운과 개 짖는 소리로 뒤척이다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아침 7시에 아주머니가 가져온 숭늉과 토스트를 먹은 후, 문밖에서 밤새 짖던 개를 다시 한번 위협하고 12코스로 향한다. 벌써 아침해는 찬란하다. 종달새가 마을 어귀에서 지저귀고 어디선가 꿩소리도 들린다. 어제 무릉외갓집에서 깜박 잊고, 올레 양말을 사지 못한 게 아쉽다. 제주산 양말인데, 신어 본 양말 중 최고 품질이다.
마을 돌담에 피어 있는 자주란
제주 농촌 마을은 집집마다 잘 가꾼 정원, 포장된 시멘트 길, 오밀조밀한 용암 돌담이 잘 조화를 이룬다. 마을 길 및 주변에 쓰레기와 먼지도 없다. 가축도 전혀 없고 반려견만 게으르게 낮잠 자는 한적한 모습이다.
공기마저 신선하고 향긋하여, 기분을 상큼하게 만든다. 돌담 사이로 귤 밭도 자주 보이고, 작은 텃밭에는 각종 농작물이 푸르다.
돌담에는 예쁜 꽃이 즐비하여 여행자의 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 돌담 옆 자주색 꽃이 있어 네이버에 확인하니 자주란이다.
이곳은 곳곳이 귤 밭이다. 귤나무에 하얀 귤 꽃이 진한 녹색 이파리 속에서 햇빛을 받고 활짝 피어난다. 귤을 재배하는 비닐하우스도 많다. 어떤 귤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고 어떤 귤은 야생 밭에서 재배할까? 비닐하우스에는 한라봉이나 천혜향 등 고급 품종을 재배할 가능성이 큰 듯하다.
몇몇 제주 밭이 태양광 발전소로 변했고 또 설치 중이다. 제주 외 지역 일반 농지는 태양광 발전 시설 설치가 제한되고, 비농지로 쓸모없는 경사지에만 허가된다. 하지만, 제주도는 농지에도 태양광 발전이 허가된 듯하다. 제주도가 육지와 멀고, 원자력 발전소가 없어 전기 생산이 부족하지만, 각종 비닐하우스 증가로 전기 소요량이 급증한 까닭이 아닐까?
마늘 밭 돌담 옆에 중형 사이즈 버스가 주차되어 있다. 버스 주변에 십여 명의 여성 일꾼이 옹기종기 모여 아침 식사 중이다. 새벽부터 마늘 수확작업을 한 후 아침 식사 중인 듯하다.
삼십 년 전 고향 근처에 쪽파 재배가 유행했고, 어머니가 일당 오만 원을 벌기 위해 쪽파 파종 및 수확시기에 매일 새벽부터 작업하러 갔다. 60대 중반 뇌졸중으로 반신마비 될 때까지 일을 하고 현금을 모았다.
작업자들이 모두 내 어머니 얼굴 같다.
마늘 밭, 태양광 발전소, 작은 묘지가 이어지는 멋없고 지루한 시멘트 길을 뙤약볕 아래서 한참을 터벅터벅 걷는다. 밭사이에 흙 길은 없다. 트랙터와 드론을 활용하는 21세기 제주 농촌에는 맨발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흙 길은 없고 타이어 고무가 좋아하는 아스팔트와 시멘트 포장도로만 있다.
낯선 도시인이 제주 농로를 맨발로 걸을 줄 누가 상상했겠는가?
줄지어 선 태양광 패널을 보며, 전기와 자기가 하나라는 멕스웰의 놀라운 통찰이 떠올랐다. 멕스웰 방정식은 미적분등 복잡한 수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문과 출신인 나는 이해불가다. 19세기 멕스웰 방정식 이후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보어의 양자역학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빛 전기 자기가 동일체이다. 태양 빛이 생명이며 전기이고 자기이다.
지구 내핵은 고체, 외핵은 액체 상태로 자기장을 만든다. 한마디로 지구 전체가 자석이다. 지구 자기장이 방어막을 형성하여 살인적인 태양풍과 자외선을 차단하여 생명을 지킨다.
인간도 세포 내에 전기를 생산하는 ATP합성체가 있다. 인간의 세포 수는 약 37조 개이고, 세포 한 개에 회전하는 ATP합성체가 3천 개 수준으로 있다. 이 작은 회전체가 우리 몸을 따뜻하게 지키는 생명 발전소이다.
보랏빛 엉겅퀴가 길가에 피어 있었다. 가시가 엉켜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엉겅퀴라고 하며 인내와 생명력의 꽃이라고 한다.
작은 도원 연못 풀밭 제방길을 걷는다. 이곳은 철새가 서식하는 곳이다. 양쪽 언덕 편은 하얀 찔레꽃 군락이 지고 하얀 해오라기 몇 마리가 우아하게 서있다. 저 멀리 머리와 목에 연한 주황빛이 있는 십여 마리 새들이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인터넷에 보니 우진조롱이며 제주도에 출몰하는 여름 철새다.
모슬봉이 저 멀리 가물가물 보인다.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도 꾸준히 걷다 보면 하루에도 아주 멀리 간다.
아직도 마늘 밭이 지천이다. 제주의 주식이 마늘인가? 냄새 강한 마늘을 백일 간 먹은 단군의 모친인 곰 덕택에 이 땅에 우리가 뿌리를 내렸다는 단군 신화가 생각난다.
마늘 밭이 정겹다. 마늘은 세계가 인정한 최고의 항암제다. 주변에 많은 지인들이 암에 걸렸고, 백세시대라는 데 더러는 60대도 못 미치고 이미 생을 마감했다. 종일 마늘 밭 길을 맨발로 지나면서 냄새를 많이 맡았으니 항암 효과를 조금은 받지 않았을까?
제주에 도착 후 처음으로 오름에 오른다. 녹남봉은 대정읍 신도리에 있으며, 해발 100미터 높이의 낮은 오름이다. 녹나무가 많다고 하여 녹남봉이다. 정상에는 둥근 가마솥 모양의 분화구가 있다. 녹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시원한 그늘 터널을 만든다. 바닥은 코코넛 껍질로 짠 매트에 솔잎과 녹나무 낙엽이 얇게 덥혀 있어 청량감을 준다. 녹나무 대부분은 후박나무다.
분화구 안에는 작은 귤 밭이 있다. 이 귤 밭의 농부는 가난하고 억척스러운 사람이겠다. 차가 다니지 못하는 오름이라 매번 힘든 발 품을 팔아야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평탄한 밭 길을 한없이 걷는다. 바람이 쉬지 않고 얼굴을 기분 좋게 자극한다. 오늘 이곳 12코스 걷는 사람은 나 혼자 일 듯싶다. 넓고 평탄한 농지의 구불구불한 농로를 걷다 보면, 주황과 파란 올레 리본이 멀리서도 잘 보인다. 리본이 어서 오라고 바람에 살랑 댄다.
드디어 신도리 해안가에 도착했다. 긴 하루의 여정이 바다 끝에서 멈췄다. 시원한 바람, 묵직한 파도, 넓은 바다가 가슴을 연다. 가로막는 섬 하나 없는 거대한 수평선이 비현실적으로 나타났다.
이곳에는 1653년 8월 네덜란드 하멜 등이 난파하여 28명이 죽고, 36명이 생포된 기념비가 있다. 하멜은 대만을 거쳐서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다 이곳 근처에서 난파된다. 하멜 표류기에 난파된 상황이 잘 묘사되었다. 하멜표류기는 하멜 일행이 13년 동안 조선에서 고초를 겪고 탈출해 성공한 후, 그 과정과 조선의 풍습을 기록한 내용이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으로 한번 들어온 외국인은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멜 일행은 군대에 배속되었고 기근 때에는 식량과 의복 등을 자급자족해야 할 때도 있었다.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정부는 매년 수많은 공물을 청나라에 보내야 했고, 또 기근이 겹쳐서 백성들이 굶어 죽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걷기는 내가 삶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걷는 여자 리지 스튜어트.
수월봉 정상 길가에 있는 글이다. 꼭 내게 한 말 같다. 수월봉에는 기후변화관측소가 있다. 건물 정문의 문구가 멋지다.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
정치가의 태도일 듯싶다.
수월봉에서 바라보니 해안 절벽 아래 파도가 부딪치며 만드는 흰 포말,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작은 두 개의 섬, 멀리 풍력 발전 날개 등 전망이 좋다.
멀리 보이는 섬이 차귀도라고 AI가 말한다.
해안 절벽 아래 길인 엉알길은 지질학 트레일 코스다. 수월봉 지역은 18,000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되었고, 엉알길 위 절벽은 화산지역 지질 형성 역사 및 구조를 잘 보여준다.
수월봉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아픈 어머니 치료를 위해 누나 수월이가 오갈피 채취하려고 절벽을 오르다 실수로 떨어져 죽은 후, 동생 녹고 가 눈물을 흘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엉알길 절벽에서 흐르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고 한다.
녹고의 눈물은 사실, 빗물이 절벽 화산재를 통과하며 맑은 물이 되어 식수가 된다.
차귀도가 정면으로 보이는 횟집에서 전복한치물회 점심을 먹었다.
오르막 포장도로를 걷다가 높이 솟구쳐 있는 당산봉으로 오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수시간 걸으니, 어깨가 아프고, 힘든 오르막이 이어지니 숨이 찬다. 당산봉은 나무 계단 경사가 높아서 힘이 많이 든다. 뱀을 모시는 사당이 있어 오름의 이름이 당산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산봉에서 해안 절벽 위로 곧바로 이어지는 올레길이 생이기정길이다. 제주도 말로 생이는 새이고 기정은 절벽이다. 해석하면 새가 다니는 절벽이다.
제주말은 어떤 뿌리에서 생겨서 한국 표준어와 많이 다를까? 제주의 수많은 방언은 우리가 전혀 의미를 추측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다. 사실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고려 때까지 자치국이었고, 조선 태종 때에 와서 자치권이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니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독립국이었다. 탐라 왕가는 고씨 및 양 씨 등이 왕의 지위를 누리며, 제주도를 오랫동안 통치했다. 또 고려시대 때 몽고인들이 말 목장으로 활용하면서, 많은 몽고 관리들이 거주했다. 이 영향이 조금은 남아 있지 않을까?
절벽 위의 길인 생이정 올레길은 걷기에 평탄하고 덤으로 저 멀리 차귀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발바닥이 최고로 좋아하는 것은 짧게 자란 잔디다.
용수 가는 해안길은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길이다. 오후 3시 반에 12코스 종점인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관 용수 절부암에 도착했다. 긴 하루의 여정이 바다 끝에서 멈췄다.
용수 성지 앞 해안가 바위에 앉아 바다를 본다. 바다는 눈부셔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반사되고, 하얗게 반짝거린다. 해풍은 잔잔하게 불어와 나를 스치고 지난다.
막힘이 없는 평화가 내 안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