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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 맨발 걷다 10-1코스
가파도

by 신피질

이 글은 2025년 5월 11일부터 10-1코스부터 22코스까지 제주 올레길을 걸으면서 쓴 글이다.

10-1코스부터 17코스 까지는 이미 연재를 했으나, 이 시리즈 연속성을 위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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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첫날이다. 오전 4시 40분에 일어났다. 면도기를 마지막으로 챙기며 배낭을 모두 쌌다. 식량, 요리 도구, 텐트도 없는데 50리터 배낭이 가득 찼다. 옷도 많이 줄였지만, 비옷, 겉옷, 바지, 속옷, 세면도구, 물통 등을 담으니 짐이 가득 찼다. 이 무게를 지고 걷는 일이 결코 가볍지는 않다. 일부러 사서 하는 고생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제 모든 걱정과 일상을 잠시 멈추고, 갑작스러운 변화 속으로 나를 던진다. 그러면 또 다른 삶이 강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이번에는 텅 빈 내면이 알프스 호수처럼 맑아져, 그 위에 제주의 바람과 돌, 나무와 길이 잔물결처럼 비추었다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낯선 짐의 무게로 발과 허리에 힘이 들어가고 상체가 기울어진다. 구룡역에서 5시 38분 왕십리행 지하철을 탔다. 익숙할 줄 알았던 지하철이 이토록 낯설다니.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녹음된 안내방송과 지하철 소음만 요란하다.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보거나 새벽잠을 청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 이웃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있는 내가 낯설게 느껴진다.


김포공항에 6시 50분 도착했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8시 20분이라 여유 있게 도착한 셈이다. 비행기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마치 배의 엔진 소리 같다. 생각해 보면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배다. 물살 대신 공기를 가르며 항해한다.


9시 21분,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제주 땅에 랜딩 했다. 쨍쨍한 햇빛과 푸른 하늘,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많은 사람들을 상상했지만, 제주공항 바깥 풍경은 기대와 달랐다. 춥지는 않지만 서울의 새벽과 비슷한 서늘한 공기, 온 하늘을 뒤덮은 구름, 이는 바람—흐린 날씨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생각에 머물러 외부 현실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그 오류를 인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스스로 오류를 인정하는 순간 즉시 변화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대부분의 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람은 새로운 경험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


“매일 똑같이 살면 세월에 끌려가게 되고, 매일 새로운 일을 하면 세월을 끌고 간다.” — 나훈아 씨가 어느 콘서트에서 한 말이다.



10시, 제주공항버스 승강장 4번에서 모슬포 남항(운진항)으로 향하는 151번 급행버스를 탔다. 운진항은 이 버스의 종점이다. 11시 20분, 운진항 도착. 올레길 11코스 시작점인 하모리 공원을 지나면 운진항 종점이다.

가파도와 마라도로 향하는 선착장이다. 가파도는 한 시간 간격으로 운항되며, 12시 10분 출항, 3시 20분 귀항으로 표를 예약했다.

도보로는 한 시간이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한다.




관광객 백여 명을 태운 울긋불긋한 블루레이 여객선이 쪽빛 바다를 가르며 흰 포말을 만든다. 육지인인 나는 바다에 오면, 그 압도적인 물의 양과 고정되지 않는 물질의 광활함에 전율한다. 몸과 마음이 느닷없이 거대한 실체와 직면한다.



가파도


마라도는 대한민국 최남단 섬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바로 옆에 있는 가파도는 그렇지 않다. 사실 면적은 가파도가 0.84KM 2로 마라도 0.3 KM2 보다 3배나 넓고 인구수도 가파도가 216명으로, 마라도 137명 보다 더 많다


운진항에서 가파도까지는 5.5KM이며 여객선으로 15분 거리에 있고 형제섬인 마라도는 이보다 약간 떨어진 13.8KM이며, 여객선으로 약 25분 거리이다.

가파도섬1.png


가파도라는 이름은 ‘파도에 더하다’는 뜻의 한자설과, 제주 방언인 ‘갓파다(가파르다)’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태평양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파도가 세다. 쓰나미가 몰려오면 섬 전체를 휩쓸릴 듯한, 산 없는 평탄한 지형이다. 방파제도 높지 않으며, 남쪽 해안가에는 해물 짬뽕, 짜장면 집 등 음식점이 있고, 일부 관광객을 상대로 한 숙박시설도 몇 개 있다.


섬 벽에 적힌 설명에 따르면, 섬 주변의 암초들이 자연스럽게 방벽 역할을 하여 강한 파도를 완화시킨다고 한다. 또한 제주 인근 5개 섬 중 유일하게 지하수가 솟는 우물이 있다고도 한다.


섬 전체는 산이 없고 대부분 청보리밭으로 덮여 있다. 5월에는 청보리 축제가 열려 여객선이 한 시간 또는 30분 간격으로 운진항에서 출항한다. 평탄한 해안도로와 청보리밭 사이로 시멘트길이 포장되어 있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유채꽃 사이를 흐르듯 스쳐 가는 사람들로 붐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영향인지 관광객 수가 더욱 늘었다.



이곳의 둘레길도 시멘트길이다.

해안가로 이어진 시멘트길을 맨발로 한참 걸었다. 발바닥 감촉이 좋지 않다. 7년 전 2코스 시멘트길에서도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신발을 다시 신었다.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오고, 해안가 도로는 자전거 타는 연인들이나,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이 있다. 차량이 없는 자전거 도로로 30분이면 자전거로 섬 주위를 한 바퀴 돌 수 있다. 널따란 청보리 밭과 일부 유채꽃을 배경으로 연인들이 각자의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촬영하다.



지난달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원농장의 청보리밭을 다녀온 뒤, 이곳에서 다시 보리밭을 본다. 지금은 낭만적으로 보이는 청보리밭이지만, 과거에는 고달픈 삶의 현장이었다. 곳곳에 ‘보리밭에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표지판이 있다.


가파도2.png



보리밭 추억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농촌에서 보냈다. 보리밭과 논은 부모님과 함께 고생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반세기 전, 한국의 주요 생산 작물은 쌀과 보리였고, 보리는 쌀보다 더 중요한 주식이었다. 추수를 다한 가을 논에, 보리를 심기 위해서 쟁기질과 고랑 형성 및 보리 씨 뿌리는 작업도 했다.


막 자라난 보리 새싹이 뿌리가 들리는 겨울철, 초등학교 전교생이 나란히 줄을 맞춰 보리밟기를 했다. 추운 겨울, 가는 눈을 맞으며, 언 손을 호호 불면서, 날이 풀려 땅에서 들뜬 보리가 다시 땅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도록 정성 들여 밟았다.


어느 정도 새싹이 자란 초봄에는 일부 새싹을 베어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섞은 보리떡을 만들어 허기를 달래기도 했는데, 나는 보리떡의 풀냄새를 싫어해서, 억지로 한 두 입 먹다가 말았다. 그 시기에 찹쌀로 만든 콩떡은 귀했고, 양이 많아지는 보리떡과 쑥떡은 상대적으로 더 흔했다. 나는 둘 다 싫어 잘 먹지 않았다. 요즘은 보리떡과 쑥떡은 귀한 건강식이다.


뜨거운 여름 곡식을 수확한 후 남은 보리대를 아궁이에 넣으면 금방 타 들어갔고,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서 쉴 틈 없이 보리대를 아궁이에 넣어야 했다.


보리씨를 뿌린 후, 논고랑의 흙을 삽으로 긁어서 얼지 말고 씨앗이 발아가 잘되도록 흙을 엷게 부었다. 하루 종일 삽질 즉 붓질을 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보리는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수확했다. 타는 듯한 땅의 열기 속에서 낫질을 계속해야 했다.


그 고된 노동 끝에야, 책상 앞 시간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되었다. 나는 숙제한다는 핑계로 가끔 고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공부한다고 하면 일 안 시켰다”라고 하셨지만, 내 기억은 조금 다르다.

이젠 그 모든 일을 첨단 기계가 대신한다. 머지않아 인공지능 로봇이 농사를 전담하게 될 것이다. 수천 년간 인간과 가축이 해온 생물학적 노동이 끝나려 한다.


그 시절 보리는 논과 밭 모두에서 수확할 수 있어 흔하고 저렴했다. 보리는 거칠어 가난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우리 집도 쌀은 귀했고, 보리가 밥상 위를 채웠다. 그래서 제삿날의 쌀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지금은 쌀이 흔하고, 보리는 건강식으로 대접받는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녀는 키가 작았다. 키가 크고 거친 아버지 및 시부모, 두 고모와 모진 가난 속에서 7남매를 키우면서 숨죽이며, 인내하며 사셨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품에 자랐고, 한 번도 시부모, 아버지, 고모 등, 남에게 대든 적이 없고, 순종과 복종을 하며 살았다. 오직 농사일, 가사,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사셨다.


어머니가 작고 약하고, 또 반항이나 화를 내지 않아서 인지, 내가 아는 어머니 별명은 반팽이였고, 나는 동네 분들의 그 별명에 분한 마음이 일곤 했다. 그 당시에 바보 병신이라는 의미로 해석을 했기 때문인 데, 지금 알아보니, 여름에 찾아드는 작은 벌레였다. 어머니 몸집이 왜소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나는 어머니가 큰소리를 내신 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맨날 화를 내도, 부엌에서 혼잣말로 속을 삭이시곤 하셨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아버지가 야산을 개척해서 수박 수확을 하신 후 그것을 팔기 위해서 수박 몇 통을 머리에 이고, 삼십 리 길을 걸어가서, 팔고 오셨다. 본인 집 근처에서는 수줍어서 팔지 못하고, 친정 집 어르신들께 팔고 오신 것이다. 나는 그 인내와 강인함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한여름에 마을 동네 분들이 두레를 결성해서, 공동으로 모심기 작업을 할 때, 연약한 어머니는 팔다리가 저려서, 새벽녘마다 우셨다. 지금도 어머니의 울음과 신음 소리가 귓전에 스쳐 가슴이 먹먹하다. 하지만, 어김없이 어머니는 아침 일찍 모심기를 나가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 안타까운 마음에, 어머니가 저녁 늦게 집에 오시기 전에 저녁밥을 지었다. 보리쌀을 물에 앉히고, 불을 땐 후에 김이 나면, 다시 쌀을 한 움큼 넣어서 밥을 짓는 일을 모내기 끝날 때까지 했다. 어머니는 이 일을 몹시 고맙게 생각하셨다.


우리 집은 쌀은 적고, 보리가 많아서, 쌀을 한 움큼만 넣어서 인지, 밥을 하고 나면, 쌀은 찾기 어렵고, 온통 보리투성이었다. 어머니는 아침에 밥을 하신 후, 김이 한 움큼 넣은 쌀을 최대한 많이 떠서, 자식들 도시락을 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두꺼운 노란 알루미늄 도시락 통은 보리밥이 거의 대부분이어서,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다른 친구들이 볼까 봐 창피한 생각이 일어났다.


당시에 학교 반애들은 대부분 은색 납작한 신식 도시락 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몇몇 가난한 친구들은 알루미늄 노란 도시락 통을 가지고 다녔다. 검은색 고무신, 책보자기, 노란색 알루미늄 도시락 통이 초등학교 등교 시 가지고 다닌 전부였다.


가파도 선착장 근처에서 보리 미숫가루와 보리쌀을 판매하고 있다. 나는 별로 안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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