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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길 맨발 걷다. 9코스 대평포구, 박수기정

by 신피질

고생과 아픔도 함께 매고 가야 한다.

다시 배낭을 메고 나왔다. 이틀간 배낭 없이 다녀서 배낭의 무게에 몸이 벌써 힘들어한다. 잠시 방심하면 몸은 편안한 상태로 금방 회귀한다.


9코스 시작은 531번 종점에서 내려서 대평포구까지 십 분 걸어가면 된다. 모든 올레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삼십 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 한두 군데 숙박을 정한 후, 짐을 나 두고 가볍게 다닌다.


제주 포구도 육지 마을처럼 역사와 전설이 함께 숨 쉰다. 삼별초를 방어하려고 해변에 쌓은 성곽, 외돌개에 있는 최영 장군의 흔적,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수대, 충헌비와 공덕비가 자주 보인다.

사실 제주도는 최남단의 국경이다. 2차 세계대전 말에 미군의 착륙을 방어하기 위해 제주도 남단에 일본군 방어 진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며칠간 하늘을 빈틈없이 막았던 회색 구름이 사라지고 남쪽의 강렬한 햇빛이 길 위에 가득하다. 하늘에 몇 조각 양털 구름만 떠 있다.

대평리 포구 집들은 대체로 가난해 보인다. 집은 작고 마당도 좁으며 흔한 감귤나무도 없다. 나무와 꽃도 없어 마을 전체가 황량하다.

어촌 포구 옆에 이태리 식당 피자리아 3657은 지중해식 건물로 가난한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궁전 같은 건물이다.

9-5.png 이태리 식당

대평 포구 정박장은 넓고 크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 일본 어부들이 고기를 잡았고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포구에는 스킨스쿠버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포구를 지나면 거대한 병풍모양의 주상 절벽 암벽 박수기정이 있다.

샘물을 뜻하는 박수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친 이름이다. 바가지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용왕의 아들이 이곳 학자에게 글을 배운 뒤 물소리 나지 않게 해 달라는 학자 소원을 들어주려고 수로를 바위로 막았다는 전설이 있다. 박수기정의 유래다.

9코스2.png 박수기정


올레길은 병풍 못 미쳐 좁은 사이 길로 오른다. 길은 작고 거친 바위와 큰 돌이 깔린 오르막이다.

800여 년 전 몽고에 말을 진상하려고 절벽 우측 편에 길을 만들고 포구로 말을 데리고 내려와 배로 운반했다고 한다.


바위와 돌길은 맨 발에 좋다.

바위와 돌은 대체로 표면이 매끈하다. 자연이 갈고닦아서 부드럽다.

반면에 시멘트길과 아스팔트길은 표면이 거칠어 맨발로 걸을 때 피부에 손상을 순다

길은 가파르게 백여 미터 절벽 높이까지 오른다.


높은 해안 제대로 오르는 길이어서 일반 육지 산행과 비슷하다.

돌도 현무암이 아닌 안산암이며 커다란 열대림이 없는 남쪽 육지의 보통 산처럼 잡목이 우거져 있다.

육지와 풍광이 매우 다른 제주의 이국적 환경에 요 며칠 익숙해져서, 이젠 육지와 비슷한 보통의 환경이 낯설계 다가온다. 인간은 정말 적응에 뛰어난 동물이다.


백여 미터 오르면 평탄한 넓은 고원이 나온다. 길은 고원에 있는 밭을 통과한다. 밭주인이 밭 한쪽을 올레길로 허용했다. 드디어 밭에 있는 부드러운 흙을 밟는다. 감사한 마음으로 밭에 자라는 작은 모종이 잘 자라기를 기원한다.


길은 절벽 근처를 따라 한참을 걷는다.

박수기정 위에서 백 미터 아래로 보이는 푸른 바다는 오금이 시리도록 아찔하다.

올레 길에는 동남아산 야자 껍질로 만든 매트가 많이 깔려 있다. 오늘 내발은 대 만족이다.

절벽 위 고지대 길이 끝나고 고인돌 같은 바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앞에 산방산이 멀리 우뚝 솟아 있고 깨끗하고 푸른 마을, 하늘색 페인트 칠 한 공장이 보인다.


길은 다시 중간 산지대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일본군이 제주도를 결사 항전지로 정한 후 화순리를 방어하려고 산기슭에 여러 개의 동굴을 만들었다.

동굴 옆을 지나는 길은 흰 꽃 천지다. 꽃을 자세히 관찰하니 흥미롭다. 마치 한 송이 꽃 같아도 십여 개의 작은 꽃이 모여 중간 크기의 송이가 되고, 그 송이가 십여 개 모여 더 큰 송이가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가족이 되고 가족이 모여 마을이 되는 것 같다.

4월은 꽃의 세계다. 야생화 대부분은 노란 꽃과 흰 꽃이다. 대부분 노란 꽃과 흰 꽃 한 가지 색이지 만 둘이 혼합된 것도 많다.


지금 흔한 찔레꽃은 흰 꽃잎에 안쪽은 노란색이다. 초록 잎 사이에 흰 꽃과 노란 꽃은 금방 눈에 띈다.

어쩌다 보라색 계열이 보인다. 엉겅퀴도 보라색이다. 잎사귀는 끝이 가시 모양이고 꽃은 수많은 바늘을 촘촘히 묶은 듯하다. 윗부분은 진한 보라색 아랫부분은 연한 보라색으로 화려하다. 하지만 진한 화장으로 독한 성질이 감추어질까?


흰색과 노란색 꽃이 많은 것은 부드럽고 순한 느낌이 들어서 아닐까? 벌과 나비도 부드러운 것을 좋아할까?

짙은 녹음에 가려 아래를 볼 수 없지만 왼 편에 넓고 깊은 계곡이 있다. 거대한 바위 암벽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왼 편은 산의 경사면에 밭과 목초지가 넓게 있다.


밭에는 꽃봉오리가 많은 어린 감귤나무가 있다.

귤이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 어린 나무가 귤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린 감귤 나무를 자세히 보니 탱자 모종의 속성이 아직 남아 있어 탱자 가시가 보인다.

9코스4.png 작은 감귤나무


방금 전 숲에서 탱자나무를 보았다. 과거 농촌지역의 학교 울타리, 과수원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 탱자 울타리에는 언제나 개구멍이 있다. 정문까지 가지 않으려고, 과수원 서리를 하려고, 몰래 드나들던 개구멍이다.

아이들은 잘 익은 탱자 껍질을 한 입 먹고, 지독한 신맛에 “에이 셔” 하며 멀리 던졌다. 이제는 아주 흔하던 탱자가, 농촌 마을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제 보니 제주도로 시집와서 귀족 같은 감귤나무가 되었다.

이곳 계곡물은 약간 푸른빛이 감돌고 탁하다. 산길의 흙도 일부 구간은 광물의 영향인지 햇빛에 반짝반짝 빛난다.


바위에서 직선으로 내려오면 십 분 걸릴 거리를 산기슭을 돌아 두 시간 내려왔다. 올레 길은 돌고 도는 길이다. 하지만 다양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신비의 길이다. 화순리 마을 밭에는 마늘이 많이 심어져 있어 마늘 냄새가 코를 찌른다.


9코스는 짧은 구간으로 벌써 종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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