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는 왜 말만 넘치고, 실천이 어려운가?

by 한재영 신피질

현대인은 더 이상 맹수와 싸우며 살아남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도시는 안전하고, 기술은 편리하며, 물리적 위험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쉽게 분노하고, 더 자주 불안해하며, 타인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유지하는 데 점점 어려움을 느낀다. 이 역설은 윤리의 문제라기보다 신경계의 문제로 이해할 때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의 뇌에는 편도체라는 작은 구조가 있다. 편도체는 위험을 감지하고 즉각적인 생존 반응을 유도하는 기관으로, 진화적으로 매우 오래된 구조다. 문제는 편도체가 반응하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편도체는 맹수나 전쟁이 아니라, 끝없이 쏟아지는 뉴스, 실시간으로 도착하는 메시지, 불확실한 미래, 사회적 비교와 평가, 그리고 끊임없이 내려야 하는 결정들에 반응한다. 이 환경 속에서 편도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활성화되고, 그 결과 교감신경이 반복적으로 작동한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 부신에서는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몸은 항상 대비 상태에 놓인다. 심장은 빨라지고, 호흡은 얕아지며, 사고는 빠르지만 단순해진다. 이 상태는 위기 대응에는 효과적이지만, 오래 지속되면 인간을 방어적이고 냉소적으로 만든다. 사랑과 자비는 이러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어렵다.


이 구조는 조직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가혹하게 작용한다. 기업의 경영자뿐 아니라 교회 주임 목사, 성당의 주임 신부, 사찰의 주지 스님 역시 끊임없는 의사결정과 책임의 부담 속에 놓여 있다. 이들은 조직의 안정과 지속을 위해 항상 상황을 주시하고, 문제를 통제하며,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역할 자체가 교감신경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구조다.


자본주의는 구조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사회이다. 사람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도 대부분 부가 많고 적음의 비교에 따라 결정된다. 부를 확대 재생산하려는 욕망이 사회 저변에 이미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비교에서 오는 두려움등으로 지속적으로 편도체를 자극시키는 단점이 있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보다도 어렵다는 말은 이런 부의 속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부유한 사람은 자선을 자주해야 한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부유한 사람이 거리에서 직접 자선행위를 하도록 하는 관습도 이에 대한 인식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조직을 활용한 자선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행하는 자선 행위이다. 그 자선행위는 전전두엽(PFC)을 활성화하여, 인색한 욕망을 장기적인 사회 번영의 목표로 변화시키고, 창조적 행위로 재 구성할 수 있다.


문제는 이와 동시에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과 자비, 용서와 내려놓음을 설교한다는 점이다. 말은 부교감신경의 언어인데, 삶의 구조는 교감신경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 간극이 커질수록 사랑과 자비는 체험이 아니라 개념이 되고, 삶에서 구현되기보다는 말로만 반복된다.


사랑과 자비는 의지나 도덕적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신경계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결과다. 이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조가 섬엽과 미주신경이다. 섬엽은 내 몸의 상태와 타인의 고통을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영역이며, 미주신경은 교감신경을 제동하고 몸에 안전 신호를 전달하는 핵심 통로다. 섬엽과 미주신경이 충분히 활성화된 상태에서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고, 연결의 대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책임과 속도가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이 회로는 쉽게 약화된다. 특히 조직 관리와 같은 역할을 오래 수행할수록 교감신경 패턴은 강화되고, 섬엽과 미주신경이 작동할 여지는 줄어든다. 그 결과 자비와 사랑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조건의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사랑과 자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반대 방향의 삶이 필요하다. 기도 또는 명상과 호흡은 미주신경을 직접적으로 자극해 교감신경의 속도를 낮춘다. 특히 내쉬는 숨을 길게 하는 호흡은 몸에게 지금은 안전하다는 신호를 전달한다. 저녁 식사 후의 느린 산책은 하루 동안 활성화되었던 편도체를 진정시키고, 섬엽을 다시 깨우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신경계를 재정렬하는 행위에 가깝다.

미주신경 (육체와 정신의 연결)



또 하나 중요한 요소는 타인에 대한 육체적 봉사다. 몸을 쓰고, 시간을 들이며, 효율이 낮은 활동에 참여하는 경험은 섬엽을 강하게 자극한다. 자비는 생각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성숙한 공동체와 지도자들은 항상 몸으로 하는 봉사를 중요한 수행으로 남겨두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조직 자체가 교감신경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구조라면, 그 안의 사람은 결국 마모된다. 의사결정의 분권화, 책임의 분산, 봉사 활동의 체계적 운영, 신도들과의 따뜻한 만남, 권위의 의도적 내려놓기는 경영 기법이 아니라 신경계 보호 장치다. 특히 깨달음을 선언하고 타인을 가르치려는 태도는 오히려 자비를 메마르게 할 수 있다. 자비는 위에서 내려올 때가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숨을 쉴 때 살아난다.


명상과 운동, 산책, 충분한 수면은 단지 건강을 위한 습관이 아니다. 이들은 섬엽과 미주신경을 발달시키고, 옥시토신과 세로토닌, 바소프레신과 같은 관계와 신뢰의 호르몬 분비를 촉진한다. 다시 말해 사랑과 자비가 발현될 수 있는 신경계의 토양을 만든다.


사랑과 자비는 더 열심히 말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몸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다. 책임과 속도가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우리는 의도적으로 신경계를 돌보아야 한다. 말이 아니라 몸에서, 교훈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랑과 자비를 회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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